이제 제자리로 돌아올 시간이야
활화산에서 휴화산으로
다시 상담을 시작했다고 해서 아이가 바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상태는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가 본인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그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가 친구처럼 다가와 달라붙은 상태였다. 그런 아이를 위해 부모인 우리는 세 부분에 집중해 아이를 보살폈다.
1. 신경정신과 약 처방
큰 아이 덕에 신경정신과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TV에서 본 정신과 의사의 진료는 상담이 많이 이뤄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신과의 진료와 상담선생님과의 상담이 비슷할 거라 여겼나 보다. 막상 체험해 보니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환자나 보호자와의 상담은 아주 길어야 5분이 채 되지 않았고 2분 남짓한 시간에 간단한 질문이 전부인 처방 위주의 진료가 이뤄졌다. 한 달 동안(처음에는 1주일 단위로 처방을 받는다. 점점 처방기간이 늘어나 1달에 1번 병원에 간다, 하지만 지금은 약이 바뀌어 1주일에 한 번씩 간다)의 아이 상태를 듣고 나서 증상에 맞는 약을 처방하고 의사 선생님 본인이 몇 마디 하면 갑자기 진료실 안이 조용해졌다. 별다른 질문이 없으면 마치 난 할 말 다 했으니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가득했다. 특히 보호자가 궁금한 점을 물어봐도 필요한 것만 간단히 말하는 대답을 듣기 일쑤였다.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지만 이곳은 약을 처방받기 위해 오는 곳이지 상담을 위해 오는 곳은 아니라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지난 5월 이후로 아이가 먹는 약 중 30%가 바뀌었다. 원래 아침에만 6알을 먹던 것이 아침 6알, 자기 전 2알로 변경되었다. 약만 바뀌었을 뿐 진료 방식은 전과 같았다. 10번 중 9번은 진료실에 들어간 지 3분 안에 나온다. 이곳은 진료를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약을 얻기 위해 오는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정신과라서 그런지 이곳은 약국이 아닌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구입하는 체계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 약국과는 달리 처방전도 꼭 보호자인 우리가 말해야 주는 곳이라 아이가 어떤 약을 먹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진료가 끝나고 약을 받을 때마다 처방전을 달라고 얘길 해야 했다. 암튼 이래저래 성에 차지 않는 병원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힘든 아이를 위해선 당분간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2. 상담 선생님과의 상담 재진행
상담 선생님은 아이를 몇 년간 봐오셔서 우리 가족 모두가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 상담실 또한 밝고 아늑한 분위기여서 상담을 위해 이곳을 방문할 때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총 1시간의 상담 시간 중 아이와의 상담으로 40분, 나머지 20분은 부모와의 상담이 시작된다. 그 20분 동안 부모인 우리는 아이와 지내며 힘들었던 점을 하소연하며 억눌린 마음을 달랜다. 물론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에 상담하며 알게 된 점은 아이에게 태권도나 합기도같이 품세 위주의 정형화된 운동보다는 트램펄린이나 복싱같이 직접 자극의 강도가 크고 아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운동이 아이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아이가 운동해서 땀을 흘리는 것만 생각했지, 아이에게 도움이 더 되는 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두 아이가 그동안 다녔던 태권도장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가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었는데 몇 달 전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던 사범님 두 분이 그만둔 뒤로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4년간 다녔던 태권도가 재미없어졌다며 그만두게 되었다.
마침 아이에게 어떤 운동을 시킬까 고민 중이었는데 상담선생님의 권유로 아이 둘을 점핑 다이어트라는 트램펄린 운동을 시키기로 했다. 내 욕심 같아선 큰 아이 핑계로 삼부자 모두가 복싱을 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형제 둘을 동시에 같은 학원에 보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 큰 아이는 보통 사람이 만족할만한 자극으로는 성에 안 차서 운동효과가 반감할 것이며 강도가 센 자극이 계속되어야 본인도 재미있어하고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릴거라는 상담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다. 지금 이뤄지는 상담의 목표는 아이가 흥분했을 때 이상행동을 없애는 게 아니라 줄여가는 것이라며 그때까지 아이와 부모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부모인 우리는 그때까지 어떡하든 힘을 내야만 한다.
3. 마지막 보루인 장모님
아이의 외할머니인 장모님이 우리를 위해 집으로 출동하셨다. 특히 장모님은 30년 가까이 거의 매일 새벽기도를 하셨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오셨다. 그래서 장모님이 집에 오시면 아무래도 집안 분위기가 다른 게 체감이 된다. 뭔가 전에 비해 안정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큰소리 내는 법 없이 늘 따뜻하게 가족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어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장모님이 조용하고 따뜻한 카리스마를 지닌 분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분이 장모님이라는 사실에 항상 감사해하고 있다.
학교 두 곳의 강사로 일하느라 바쁜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의 식사를 책임져주신다. 할머니가 오실 때면 아이들은 항상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말하며 “할머니 맛있어요”를 외쳐댄다. 장모님이 집에 계실 때면 ADHD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정말 아이의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겪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을 듯) 화가 난 부모와 잔뜩 뿔이 난 아이의 고성이 사라지고 집에 평화가 가득 찼다. 5월 한 달 동안 2주 가까이 우리 집에 머무르셨던 장모님의 처방은 “자기 전 온 가족이 모여 성경책 한 장씩 읽고 간단히 기도하기”였다. 그래야 가족 모두가 예수님 말씀 따라 살게 된다며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며칠이 흘러 큰 아이가 한 달 만에 중간에 조퇴하지 않고 학교 수업을 마쳤다. 그날 저녁, 마치 누군가의 생일인 양 케이크를 사서 불을 붙인 후 온 가족이 모여 아이의 힘든 나날이 끝나고 학교생활이 새롭게 시작된 걸 축하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맘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