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형은 남성이다. 남성은 그냥 인간이고, 여성은 그냥 인간에서 여성성이라는 기호를 덧붙여야 비로소 여성이 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로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픽토그램에서, 남성은 그냥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 사람의 형태에서 리본이나 치마를 덧붙여야 비로소 여성을 가리키게 된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인간의 기본형인 남성과 끊임없이 구별되는 방식으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트랜스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시스여성들도 매일매일 여성-되기를 수행하고 있다.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감정노동,돌봄노동 등)을 해내기를 요구받는건 시스여성이나 트랜스여성이나 마찬가지이다. 시스여성도 머리를 짧게 하거나 외모를 꾸미지 않으면 남자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나는 정체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종종 여성성 수행의 압박을 받고는 했다. 예를들어 회사에서 ‘남직원’ 으로 다녔을 때는 외모나 옷차림에 대해서 어떠한 코멘트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는 내 머리스타일과 화장 여부, 옷차림에 대해서 질문이나 지적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머리를 좀 이렇게 해보세요” 라던지, “그 옷은 안 어울려요” 라던지, (민낯을 언급하며)꾸미는건 별로 안 좋아하나봐요“ 라던지 혹은 더 심한 경우는 “그 옷을 입으니 남자가 여장한거 같다”, “남자같이 걷는다” 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다. 여성성 수행이 서툰 나에게 나름대로 ‘여성 선배’ 로서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겠다는 의도였는데 나는 그런 말들이 큰 상처가 되었다. 도대체 여성이라는건 뭘까. 머리와 옷차림을 어떻게 해야, 걸음걸이는 어떻게 해야 ‘여성스러운’ 것이 되는지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참 어렵고 버겁게 느껴졌다.
여성성 수행의 압박은 인간관계에서도 느꼈다. 남성으로 살아갈 때는 물론 ‘남자다움’에 강박과 집착은 강했지만, 그것은 남성집단에서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인정욕구였다면 트랜스여성으로서의 여성성 수행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공포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외모를 잘 신경쓰지 않는다거나, 옷차림이나 몸가짐을 편하게 한다던가, 말투나 태도가 조신하지 않는다거나 하면 사람들이 남자같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실제로 하리수 씨는 다리를 벌리고 편하게 앉으면 “남자(였던 사람이)라서 저렇다” 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트랜스여성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열심히 추구하고 잘 해내도 그건 그거대로 ‘성 고정관념에 찌들어있다’ 라고 욕을 먹는다. 이것 또한 트랜스젠더 혐오인데, 뒤에가서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겠다.
내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내 몸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정체화하고 나서부터는 내 신체가 부위별로 쪼개서 의식이 되었다. 팔뚝,어깨,가슴,허리,배,허벅지,종아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여성의 신체에 내가 얼마나 부합하지를 검열하게 되었다.
사회적 미에 부합하지 않는, 다양한 외모와 신체를 가진 여성들을 미디어에서 잘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나도 더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옷을 살 때도 큰 괴리감을 느꼈다. 남성들이 입는 옷은 다양한 사이즈가 있는 데 반해, 여성들이 입는 옷, 특히 예쁘다고 여겨지는 옷들은 거의 다 ‘free 사이즈’라고 하나만 있는데 다 너무 작았다. 체격이 크지 않은 내가 못 입을 정도면 아마 다른 여성들 중에서도 못 입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이래서 여성들이 다이어트의 압박에 시달리는거구나 싶었다. 옷에 몸을 맞춰야 하니까.
다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가 많다는건 좋았다. 애초에 ‘꾸밈’이나 ‘아름다움’의 범주가 여성에게 더 많이 허락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범주 역시도 가부장제나 성별위계와 연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꾸미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적정 선에서 그 욕망을 조율하고 타협해나가는 과정이 자신을 더 발견하게 해주고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는 기호나 수행성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