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가 빠른 아이
행사에 쓸 샤인머스캣을 손질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한 녀석이 다가왔다. 너무 밝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그 친구는 샤인머스캣 손질하는 내내 옆에서 쫑알쫑알 이야기를 한다.
이건 누가 먹을 건지 왜 하는 건지 지금 먹으면 안 되는지 이건 못생겼으니 이건 다른 것보다 작으니까 이건 다른 거랑 색이 좀 다르니까 먹어도 되지 않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제안하기 바빴다.
내 눈에 그 아이는 마냥 아이답고 순수하고 귀여웠다.
‘그래 이게 아이다운거지…’
속으로 생각하며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잠깐 기억했다.
마음껏 먹으라고 할 수 없는 공동 간식을 준비하는 거라 몇 알 맛보게 해 주는 게 전부였다.
한 알 한 알 손질하고 가지에 붙어있던 부분을 깨끗하게 잘라내었는데 그 자투리라도 먹겠다며 가져간다.
부모님이 이쁘고 좋은 것을 골라서 주는 아이일 텐데도 그렇게 먹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그 아이는 곁에 있었고 자투리가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샤인머스캣을 좀 더 먹을 수 있었다.
샤인머스캣을 손질하고 있는 나를 본 아이들은 꽤 많았다. 그런데 나에게 온 아이는 이 친구 단 한 명뿐이었다.
나한테는 이게 중요한 거다.
‘당연히 저건 내 것이 아니지.‘
’아 맛있겠다.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아마도 어린 시절 나였다면 말도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그렇게 내 갈길을 갔을 거다. 해보거나 물어보는 거 대신 안될 거라고 믿고 포기하는 게 빨랐던 아이. 오늘 찰나의 순간에 만난 나의 내면아이의 이름은 ‘포기가 빠른 아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고 ‘어? 이건 뭐지? 이건 뭐예요?’ 묻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최대한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려 했던 포기가 빠른 아이는 스스로 될 것 같은 일과 안될 거 같은 일을 빠르게 처리해 버리며 자랐다.
이런 작고 사소한 생각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에 존재한다.
갖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먹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할래 저렇게 할래 누가 물어봐도 난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익숙해진지 너무 오래다.
그래서 나는 참 조용하게 존재감이 없이 살았나 보다. 오늘 이 일을 지나며 나는 그 아이의 이름과 성격 특징 같은 것이 완전히 각인되었다. 그냥 보고 지나간 아이들은 아직 반나절이 지나지도 않았지만 얼굴도 생각이 안 나고 스쳐지나 갈 때 입었던 옷 색깔조차도 기억에 없다.
이 모든 행동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오늘에야 알았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도 돼.’
‘모든 상황이 내겐 안전해.’
‘이 세상은 참 흥미로워.’
어린 시절에 이런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내가 겪어야 할 일들은 꽤나 버겁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해내야 했다. 왜냐면 이제는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 되는 게 참 많았던 포기가 빠른 아이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화조차 내지 못한다. 화내서 뭐 해. 그래도 안될 텐데. 그 상실을 겪기 싫어서 먼저 포기하고 스스로 포기했으니 덜 슬프고 덜 아파도 된다고 믿으며 살았다.
‘마음먹은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궁금한 건 물어보면 돼.‘
‘모르는 건 물어보면 돼.’
‘그래도 괜찮아.’
‘이 세상은 참 안전해.’
‘이 세상은 참 즐거워.’
‘네 인생을 기쁘게 즐겨.‘
이제라도 내게 마음껏 말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