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부재의 이유, 가족희생양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_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
세상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늘도 있습니다. 이제 빛이 비치는 뒤쪽, 그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쌍둥이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도 쌍둥이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런 그늘도 감수했기 때문에 쌍둥이의 성취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 단절의 원인은 저의 감정 폭발이었습니다. 감정 폭발의 원인은 아내와 쌍둥이가 저를 남편과 아빠로서 존중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내와 쌍둥이가 저를 무시하는 태도와 행동을 보였을 때, 참지 못하고 한순간에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아내나 쌍둥이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저의 일방적인 의견일 수 있습니다).
저는 부모와 대화나 감정적 교감이 거의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저는 아내나 쌍둥이와 대화나 감정적 교감에 미숙했습니다.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공부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평소에 대화나 감정을 나누지 못하고 회피하고 억눌러 왔던 화와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남편입니다. 저는 가정의 대소사를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여섯 번 이사하는 동안 이사를 결정하고, 실행하고, 이사 후에 정리하는 것도 전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아내와 상의하기보다 혼자서 삭이면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가끔은 아내가 거친 표현을 해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습니다. 내향적인 저는 표현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회피하는 게 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쳤을 때, 쌍둥이의 갑작스러운 도발에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아내가 저를 무시하는 태도가 서너 살 아이들에게 전이된 듯했습니다.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쌍둥이가 마치 아내가 제게 그러는 것처럼 아빠를 윽박지르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을 처음으로 고스란히 서너 살 어린 쌍둥이에게 표출했습니다. 그 충격은 제가 가늠하는 것 이상으로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쌍둥이가 심하게 반항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때도 이성을 잃은 것처럼 화를 냈습니다. 그 발단은 아들이 아내에게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 변명하고 반항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이때는 아들을 회초리로 심하게 때렸습니다. 당시 수영을 배우던 아들은 회초리 자국 때문에 한동안 수영장에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정의 표출 방식으로 저도 쌍둥이에게 감정을 폭발시켜 버리고 만 것입니다. 쌍둥이와는 이때부터 많이 서먹해졌고 대화도 뜸해졌습니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면 그 일이 있고 나서 십 년이 넘은 지금도 저 자신이 어렵고 힘듭니다.
한때 가족 상담을 받았습니다. 저는 상담사에게 회사에서 상사와 대화가 어렵고,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상담사는 그 이유를 아버지와 관계 때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쌍둥이도 저와 비슷한 트라우마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윗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쌍둥이에게 "대화를 왜 피하느냐?", "이제 대화를 하자" 이런 말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슬프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고 저는 제 생활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것도 아이들의 인생을 '존중'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의 감정적 문제를 알아보고 치유하기 위해 심리학 관련 책을 자주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용어를 발견했습니다.
'가족희생양'
우리 가족은 저를 빼고 세 사람은 사이가 좋습니다. 특히 쌍둥이는 사이가 좋아서 오손도손한 모습입니다.
주위에서 자녀들이 자주 다투거나 갈등이 심한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우리 가정에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쌍둥이도 가끔 대립하고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싸운다거나 심각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아내와 쌍둥이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결속력이 생기고, 서로는 사이좋게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아내와 쌍둥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격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공공의 적'인 저에게 투사해서 해소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내와 쌍둥이가 예민하게 대립하는 사춘기에도 다투거나 멀어지기보다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듯합니다.
저는 수동적이고 소심한 성향이라서 그런지 소외되거나 대화가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습니다. 쌍둥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공격성을 밖에서 표출하지 않고, 집안에서 저를 통해 해소해서, 잘 지나왔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는 정리 승리를 해봅니다.
언젠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때가 올 것을 기대하며, 저는 오늘도 쌍둥이와의 침묵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