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도 싫어병도 수영이 약이지.
"울고 싶어서 수영장에 갔어. 물속에서 울면 아무도 모르니까."
오래전 회사 동료에게 들은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놀라움도 생생하다. 땅이나 하늘보다 물속이 울기엔 최적의 장소일 수 있구나. 울고 싶을 땐 수영장에 가야 하나. 수경에 눈물이 가득 차서 앞이 안 보이면 어쩌지. 그때만 해도 휴가나 여행이 아니면 수영장에 발가락 하나 담그지 않는 주제에 수영장에서 울 생각을 하니 걱정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런 걸 괜한 걱정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수영도 안 하면서 괜한 걱정만 사서 하던 내가 매일 수영을 하는 수영인이 되자 이런 말도 들었다. “수영하러 갈 시간에 원고를 써 봐" 지난해 쓰던 책의 원고 마감 일정에 늦어 괴로워 할 때 들은 말이다. 나 하나 원고 마감을 늦게 하면 편집이 늦어지고 교정이 늦어져서 디자인까지 늦어지는 도미노 현상을 알면서도 원고는 참으로 잘 안 써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생각하면 방구석에서 원고만 쓰려고 하면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았다. 그래서 기어코 매일 수영장에 갔다. 응?
밤이면 기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잠들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원고를 쓰다가 알람 소리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수영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던 날들이었다. 마음은 답답한데 창문 사이로 스미는 아침 햇살은 찬란했다.
아직 일 관련 카톡이 울리기엔 이른 아침이지만, 일단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락커에 넣고 샤워실로 들어갈 때 기분이 홀가분 했다. 수영장에 있는 동안은 스마트폰에서 해방되는 시간. 그래설까. 수영장에 수십명의 사람들과 같이 있지만 같이 있지만, 자발적인 고립의 시간을 갖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지난해 여름 갓 중급반에 진입해 수영 강습은 버거웠다. 호흡 하느라 바빠서 내 마음이 힘든 것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힘듦을 견디고 나오면 다시 일을 시작할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일단 눈을 뜨면 수영장에 갔다. 그리고 수영장에 돌아와 락스 냄새를 풍기며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올해는 새로운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이 책이 끝나면 곧 다른 책 집필을 시작할 계획이다. 여전히 백지를 보면 두렵고 시작은 어렵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뭐든 써진다. 그리고 뭐든 쓰기 위해서든 아침 햇살을 보고, 스트레칭을 하고, 씻고 수영을 하는 게 좋다. 잠이 좀 안 깨면 어때. 그 힘든 수영을 해내고 또 씻고 나도 고작 아침 8시 반. 시계를 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니까.
저녁이 되면 아, 오늘 한 일이 고작 원고 2장 쓴 게 다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썼다 지우느라 한 장도 못 채운 날도 있다.) 맥주나 와인을 잔에 따르며 하루를 돌아본다. 새벽 수영하고, 집밥 챙겨 먹고, 식물에 물도 주고 요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원고를 썼으니 그리 나쁜 하루는 아닌 것 같다. 매일매일 일상의 루틴을 지겨워하지 않고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잘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는 내일의 수영 가방을 싼다.
p.s 글이 짧아서 놀라셨나요? 저는 오늘 전주로 워케이션을 왔어요. 내일은 새벽 수영을 갈 수 없다는 이야기죠. 부디 내일은 설 대목에 가락떡 뽑듯 원고를 쭉쭉 뽑고 전주를 떠나기 전에는 찜해둔 수영장에 원정 수영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호텔 책상에 앉아 있어요. 응원해 주세요. 다음 주에 더 긴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