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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1. 2020

나를 기쁘게 하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리움 일곱> 

- 생각만 해도 행복감으로 충만해지는 그리움이 있다그런 것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 즐겁다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작가 중에 '커트 보니것'이라고 있다. 글에 위트가 넘친다. 그는 대학 졸업식 연설가로도 인기가 많았다. 뻔한 얘기를 지루하게 늘어놓기보다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를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기로 유명했다. 단골 레퍼토리는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인생을 진정으로 즐긴 알렉스 삼촌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이 연설.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촌은 행복할 때마다 그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습니다.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면 삼촌은 이야기를 끊고 불쑥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저는 여러분도 남은 생애 동안 이렇게 해보길 권합니다. 인생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잘 풀릴 때마다 잠시 멈춰서 큰소리로 외치세요.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이 연설이 뭘 의미할까? 그렇다. 행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냥 저냥 사는 중에도 감사한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 잘 찾아보면 반드시 있다. 예를 들자면 쓰디쓴 첫잔들 가운데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어떤 첫잔 같은 것. 

    나는 안다. 살아 들어가는지 죽어 들어가는지는 그날의 첫잔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첫잔이 전혀 부담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면 술자리 끝 무렵의 내 모습은 대개 정해져 있다. 기억의 안드로메다행. 직립보행을 포기한 네 발 기기. 그렇다고 해서 달콤한 첫잔의 아름다운 순간을 어찌 즐기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죽어 들어갈지언정 첫잔이 달콤하게 느껴질 땐 그 순간에 감사하며 커트 보니것처럼 외치는 거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몹시 사랑한다.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고취시키는 것들의 목록이다. 오글거림은 당신 몫으로 남겨 두겠다. 부끄러움은 내 몫으로 가져갈 테니.      


눈곱만큼의 걱정이나 불안이나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어떤 하루. 

다시 돌아가고픈 시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기분 좋은 향기.

저물녘 온화한 공기에 실려 은근히 퍼지는 교회 종소리. 

무더운 여름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

새벽의 푸름을 가르는 수평선의 강렬한 붉은 빛.

무료한 오후 어디선가 들리는 새들의 경쾌한 지저귐.

평범한 어떤 것도 특별하게 만드는 한없이 부드러운 광선.

추운 겨울날 창으로 스미는 따스한 햇살.

봄이 밀어 올린 투명하리만치 맑은 연초록의 나뭇잎.

평소처럼 일어나 습관처럼 커튼을 걷었을 때 펼쳐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하얀 세상.

구름이 느릿느릿 흐르는 베이지톤 믹스 블루의 은은한 하늘.

문득 떠오르는 어릴 적 동무들의 티없이 맑은 얼굴.  

너의 속삭임, 너의 숨결,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 너 그 자체.

그러나 오는 시간, 마침내 가는 시간.

마치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안내하는 듯한 어둡고 비좁은 헌책방의 통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체취가 묻은 헌책방 특유의 종이 삭는 냄새.

한밤중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햇빛에 반짝이며 흐르는 맑은 시냇물.

달콤한 과즙이 넘쳐흐르는 갓 딴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촉촉한 크루아상을 오븐에서 막 꺼내는 오전 10시의 동네 빵집. 

호수면에 일렁이는 달그림자.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막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들판이 어제와는 다른 가을의 첫날.

해가 진 직후 거리에 하나둘씩 켜지는 불빛들.

따뜻한 말 한마디.     

    

    이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가능한 어떤 것들을 만나러 가는 행위가 나의 여행이 되기도 한다. 그런 날씨를 기다리고, 그런 시간을 기다리고, 그런 냄새를 기다리고,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정말로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지역, 어느 명소, 어느 음식점을 미션수행자처럼 찾아서 탐방하는 것만이 여행이라면 그 여행은 얼마나 지루하고 시시할까. 나는 지금 위의 목록에 더 추가할 만한 게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보고, 내가 사는 동네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려도 보고, 딸아이와 소리사냥을 하며 잡아 온 포획물들을 들어도 보고 있다. 걔 중 진정 내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를 위의 목록에 추가할 것이고, 나는 조만간 그것을 만나러 다녀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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