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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2. 2020

나를 슬프게 하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리움 여덟> 

- 생각만 해도 마음 아린 그리움이 있다그런 그리움을 마주할 때는 아픔과 슬픔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견딜 용기가 있어야 하듯이.     


     


    아름다운 것들은 다 기쁘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어떤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정말 웃프게도 만들고, 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도 만든다. 바로 이런 것들.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고르고 고른 말들을 조심스레 꺼내는 엄마의 담담한 목소리. 

내 세계가 결코 될 수 없는 신기루.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No.21, 1악장 도입부의 유장한 선율.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사분사분한 너의 노래, 이제는 맡을 수 없는 은은한 너의 체취, 이제는 만질 수 없는 단정한 너의 머리카락, 이제는 볼 수 없는 말끔한 너의 얼굴,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한 너. 

그러나 가는 시간, 기어코 오는 시간. 

한밤중 들려오는 길고양이의 가냘픈 울음소리. 

해를 넘겨서야 겨우 내린 첫눈. 

10월의 벚꽃.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찬란한 모든 날들. 

여섯 단이나 사서 뿌듯하지만 저걸 다 언제 벗길까 막막한 고구마순. 

통풍의 전조를 느껴 불안한 와중에도 뿌리칠 수 없는 치맥의 환상 조합.

간발의 차로 놓친 막차가 유유히 빠져나간 텅 빈 플랫폼. 

꼭두새벽부터 부엌에서 들리는 도마질 소리. 

뽀롱이의 자유 의지. 

코돌이의 (쓸 일 없던) 길고 날렵한 엄니. 

뮨: 달의 노예. 

어쩌다 하늘에 뜬 무지개. 

쓰러져가는 동네의 화사한 벽화들. 

……그리고 살랑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진 4월 3일의 맑고 붉은 동백꽃들.      


    동백동산을 찾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무에 달린 동백꽃 보기가 어려웠다. 4월 3일, 봄은 아직 한창이었는데……. 선흘 곶자왈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주 오래된 이 동백숲에는 떨어져 제 빛을 잃어가는 꽃들이 처연했다. 

    숲길을 걷는 동안 심심찮게 동굴이 보였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아픔 중 하나인 4.3사건 당시 주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 가운데 도틀굴과 목시물굴은 결국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부녀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총살을 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제주에서 동백꽃은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이다. 이맘때 가장 붉어야 할 동백꽃이, 광기 어린 바람에 의해 내 할아버지가 당했듯 영문도 모른 채 차디찬 땅으로 무수히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왜 남겨졌는지 영문을 모르는 동백꽃들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입을 굳게 닫았다. 그렇게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작게나마 소리 내어 울 수도, 굳게 닫았던 입을 조금씩 열 수도 있게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너무나 오래 걸렸다. 떨어진 동백꽃에게도 남은 동백꽃에게도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잔인한 시간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다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돌아올 봄의 4월 3일에는 동백꽃 만발한 숲을 점점 더 가벼운 마음으로 거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백꽃 #동백꽃지다 #4.3사건 #그리움 #아픔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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