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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1. 2020

못생긴 아름다운 손

<그리움 아홉>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밀려들 때면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따라와서는 지난날의 고백성사를 하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후드득후드득 호두 비가 내리는 영동 괴재. 한 노파가 이미 새우처럼 굽은 허리를 더 굽혀가며 떨어진 호두를 줍고 있었다. 나무에 달린 호두를 장대로 털어내야 하지만, 그럴 힘이 없어서 떨어진 것들만 하나씩 줍노라 했다. 나무라도 흔들면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물으니 손사래를 치며 관두라 했다. 어차피 언젠가 다 떨어질 호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노파는 대신 말벗이나 하다 가라 했다. 

    노파는 사실 말벗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필요했다. 스물도 되기 전에 시집와서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홀몸으로 갖은 고생하며 자식들 키운 사연이 술술.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내용이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침드라마에서 익히 보던 것이어서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그렇지만 노파 스스로는 마치 씻김굿을 하는 듯했다. 격정적으로 해원을 쏟아내면서 차츰 편안해지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노파는 아주 홀가분해 보였다.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나 역시도 아주 홀가분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의 만남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뜨려니, 노파가 손에 쥐고 있던 호두 두 알을 건넸다. 호두보다 노파의 손에 눈이 갔다. 험하기가 이를 데 없는 손이었다. 갑자기 노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노파의 이야기를 빤한 신파극의 줄거리쯤으로 취급했던 것 때문이었다.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내 어머니다. 나처럼 누군가는 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신파조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선 안 될 삶이다. 눈물샘이나 자극할 목적으로 지은 삶이 아니라 진짜 눈물로 지은 삶이다. 내게 호두를 건넨 노파의 삶이 그렇듯.      


어머니의 손은 볼품없다. 

주름만큼이나 터서 갈라진 곳이 많다.

손톱 끝에는 항상 까맣게 때가 끼어 있다.

퉁퉁 부은 손가락 중에는 비틀어진 마디도 더러 있다.

도무지 여자의 손이 아니다.

결혼 때 챙기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던 아버지가 

수년이 지나서야 선물한 아직은 예뻤을 적의 반지가 

너무 작아져서 이제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딱 하나뿐인 반지인데.

나는 다른 어머니들의 손을 유심히 본다. 

고운 손을 가진 어머니들이 진심으로 부럽다. 

그런 손과 비교되는 내 어머니의 손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런 손을 가질 수 있는, 적어도 육체적으로라도 덜 힘든 

그런 삶을 내 어머니도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글픔과 죄스러움에 부러운 것이다.

하지만 6남매를 키우기 위해 소 먹이고 밭 매며

억척스럽게 생을 버텨온 내 어머니의 삶이야말로

고운 손을 가진 어떤 어머니들의 삶보다 더 고귀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머니 #그리움 #손 #결혼반지 #씻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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