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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01. 2020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은 가슴을 후비고

<그리움 다섯>

- 이 세상 어디에도 그리움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 줄 진통제란 없다연관된 모든 기억이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는 이상 그리움은 언제든 폐부에서 고개를 치켜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희극을 추구한다. 자신이 겪었던 비극의 기억을 그 자체로 견뎌낼 힘이 없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기억에 손을 댄다. 비참함을 덜어내고, 빈자리를 낭만으로 채운다. 반면 제 것이 아닌 비극은 당사자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든 말든 더 처절하길 주문한다. 카타르시스는 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적 파괴로부터 온다면서. 이처럼 잔인하게 뻔뻔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어떤 비극은 아무리 각색을 해도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그런 비극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떠오르고, 한층 더 떠서 그 기억 속의 누군가가 하염없이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첫눈도 내리지 않고, 1년의 마지막 날도 없고, 벚꽃도 피지 않고, 2인승 자전거 운행도 원천 금지하고, 별도 달도 무지개도 뜨지 않는 그런 세상이라면 조금 나으려나? 그와 연관된 기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라면.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왜? 왜? 나로선 결코 대답이란 걸 할 수 없는 질문이다. 모든 대답은 변명이고 핑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도 하란다. 그거라도 하란다. 무슨 얘기라도 하란다. 그 말이 심장을 무참히 난도질한다. 그의 방문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전혀 익숙해지질 않는다. 속수무책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그가 떠난 후 너덜너덜해진 심장을 조심스럽게 꿰어맞추는 것뿐이다. 아무튼, 그가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면, 매번 꽃별의 ‘히칸바나’를 읊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두 줄의 현이 토하는 칼칼하지만 묵직한 소리가 무심하게 상처를 긁는다. 아프지만 이상하게 편안하다. 나는 어쩌면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그나저나, 나는 그 선율만큼이나 이 곡의 부제에서 위로를 받는다. ‘뿌리를 먹으면 기억을 잃는다는.’ 나는 이 곡의 주요 마디들을 읊조리며 정말로 그 부제처럼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히칸바나는 꽃무릇을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정확히 짚자면 ‘칸’이라는 센소리가 아니라 ‘간’이라는 부드러운 소리로 발음을 해야 한다. 한자로 옮기면 피안화(彼岸花)다. 추분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피는데, 일본에서는 춘·추분 전후 3일을 피안이라고 한다. 먼저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기간이다. 피안은 번뇌와 고통이 없는 세계다. 그런 곳이란 이 세상에 없으니 피안은 저 세상이다. 피안에서 그럴 것이라 예상되는 것처럼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저 그리워만 하자는 것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다. 행복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든, 상처로부터 파생된 것이든, 그리움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이 꽃을 묘지 주변에 주로 심었다. 짐승들이 무덤을 파헤쳐서 사체를 훼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 주변에 주로 심었다. 뿌리를 짓이겨서 그 즙을 기둥에 바름으로써, 개미나 여타 해충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짐승이나 곤충의 접근을 차단하는 데 꽃무릇이 이용된 이유는 독성 때문이다. 이 꽃의 뿌리에 맹독이 함유돼 있다. 암과 같은 악성 종양을 다스리는 데 이용될 정도로 독이 독하다. 그런데 그 독은 어쩌다 생겼을까? 그리움이 녹아 독이 되었을까? 그리움을 녹이려 독을 취했을까? 꽃무릇은 흔히 상사화라고도 부른다. 잎이 진 후에야 꽃이 피는 까닭에 서로를 그리워하며 상사병을 앓는 꽃이다. 꽃무릇의 그리움은 태생적 그리움이다. 꽃과 잎으로 핀 것을 서로 본 적조차 없지만, 가슴 미어지게 보고픈 그리움. 씨앗 속에서 함께 한 기억 때문이 아니고서야 달리 무엇으로 그 그리움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예고 없이 찾아와 나를 점점 힘들게 하는 그를 이제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다. 하지만 그와 나눴던 모든 시간마저 통째로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일. 진정으로 행복했던 추억마저 버려야 할 일. 그러지 않으면 어디서든 또 떠오를 일. 

    독하디 독한 꽃무릇의 뿌리를 먹으면 정말로 기억을 잃게 될까? 암처럴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언제든 나타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그를, 그와의 시간을 지울 수 있을까? 혹시 내 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그 무게를 잴 수조차 없이 무거운 꽃무릇의 짐만, 날 때부터 키워온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그리움만 하나 더 짊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꽃무릇 #상사화 #이별 #그리움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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