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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13. 2020

모든 것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리움 열셋>

- 어느 시점에서 어떤 심리상태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모습은 달리 포착된다자신의 협소한 관점으로 특정 대상을 향한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나는 그가 그리워 죽을 만큼 힘든데누군가에게는 그 모습이 참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정선 가리왕산 가는 길에 늙은 물푸레나무 하나를 보았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한참이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수십만 개에 달하는 촉수를 낱낱이 뻗어서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정말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곁에 있던 이는 조금 무섭다며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그렇지. 아름다움은 관점의 차이. 아름다움에 대해 정의하는 것보다 미련한 짓은 없다. 아름다움이란 어느 한 시각 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매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주체의 몫이다. 객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객체는 시간, 빛, 기온, 기분, 관계 등 여러 조건에 대응하며 변화한다. 주체는 그런 객체에 반응하며 마음을 빼앗긴다.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사랑이다. 누군가는 싱그러운 새잎이 돋아난 봄의 나무에서, 누군가는 폭풍우에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리는 여름의 나무에서, 누군가는 단풍이 곱게 내려앉은 가을의 나무에서, 누군가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의 나무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사랑처럼 감정의 문제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실체처럼 분석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완벽하다고 말하는 비례보다 우스꽝스러운 비례, 화려한 색을 사용한 뛰어난 기교의 그림보다 촌스러운 색을 사용한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림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아름답게 느끼는 것을 상대가 아름답게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왜 너는 아름답게 느끼지 않느냐고 나무라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해서는 결코 안 되듯.      



    요즘, 나는 나무 특히 앞서 말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의 나무에 꽂혀 있다. 잎을 다 떨군 나무야말로 가장 정직한 나무의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잎이라는 옷을 벗었을 때, 비로소 나무의 몸이 고스란히 보인다. 곧게 뻗어 나가다가 장애물을 만나 기형적으로 휘거나 굽은 줄기, 부러진 가지와 어느새 흉터가 된 옹이 따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분명 그런 것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붙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연을 알 길이 거의 없지만, 아픔만은 알 수 있기에 가만히 나무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곤 한다. 

    물론 나는 나무의 아픔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나무가 너무나 아름답다. 밑동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봉정사의 상수리나무나, 형극의 세월을 혼자 다 살아낸 것 같은 어느 바닷가의 서어나무, 시들시들 죽어가면서 수면에 그 모습을 비추어 자신의 현재를 들여다보는 대청호의 버드나무(겨울에는 새벽녘 피었던 서리꽃이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흩어진다)에 대한 연민과 별개로 나는 그것들이 아름다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헐벗은 나무들은 내게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잎이 없어야 보이는 것은 나무의 본 모습만이 아니다. 거기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새들의 둥지도 보인다. 나무 위에 견고히 지어진 둥지를 발견할 적이면, 내가 남에게 전하거나 혹은 내가 남으로부터 파악해야 할 진심이 저 둥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잎으로 그 존재를 숨겼던 둥지처럼 가식과 허울을 지우지 않고는 진심을 전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둥지를 훤히 드러낸 나무는 겉을 걷어내지 않고서 곁을 얻을 수는 없다고 나를 가르친다.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사랑 #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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