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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14. 2020

아낌없이 주는 꽃

<그리움 열하나> 

- 까불거나 나대지 않고 마치 없는 것처럼 아주 조용히 자신의 할 도리를 하고 가는 것들우리가 지금보다 더 고마워하고 그리워해야 마땅한 것들     


  

    봄이 좋다. 정말 좋다. 계절 바뀜 없이 만날 봄이었으면 좋겠다. 화려한 쓸쓸함이 우울을 낳는 가을과 그저 버티는 데 온몸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나머지 두 계절을 봄의 색으로 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계절이 늘 움트는 생명의 활기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비어가는 내 생기의 저장소에 아무 때고 봄의 활기를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면 더는 소원이 없을 만큼 좋겠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죽음이 곧 생명의 씨앗. 나고 자라고 시들고 죽고 다시 나고. 그게 이치니까.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철쭉, 벚꽃, 복사꽃, 수선화, 얼레지, 제비꽃, 목련, 모란, 수수꽃다리, 아까시꽃, 산자고, 솜방망이, 때죽나무꽃……. 봄에 피는 거라면 어떤 꽃도 다 사랑스럽다. 봄꽃 앞에서는 마음이 완전히 무장해제 된다. 가끔은 봄꽃들을 보다가 괜스레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이런 나를 보며 누군가 갱년기라 그렇다고 놀렸다.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갱년기의 눈물샘을 아무나 자극하는 건 아니다. 

    4~5월이면 주로 빈 논에 피는 자운영꽃도 갱년기 눈물샘 자극 인자다. 화려한 봄꽃들 틈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자줏빛 꽃이다. 이름 모를 잡풀이 피운 그저 그런 꽃쯤으로 많이들 여기는 꽃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고 마는 꽃이다. 그렇게 그냥 지고 마는 꽃이다. 하지만 이 꽃을 나만큼이나 예뻐하는 사람들이 있다. 농부들이다.      



    자운영은 농촌에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재배하는 콩과의 식물이다. 사실 딱히 재배랄 것도 없다. 추수가 끝난 논에 씨앗을 대충 흩뿌리는 것이 전부다. 그러면 이듬해 봄에 그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이내 무성하게 자라서 초록잎으로 논을 뒤덮다시피 한다. 고운 자줏빛 꽃은 덤이다. 자운영꽃은 산형꽃차례다. 꽃대 끝에 7~10개의 꽃이 방사형으로 달린다. 그 모양이 마치 자줏빛 구름을 닮았다고 해서 자운영(紫雲英)이다. 꽃대에 붙어있는 아래쪽이 하얗고 위로 올라갈수록 자줏빛이 짙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봄꽃들에 쏠려 있는 동안 누구도 돌보지 않는 논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그러다가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이 꽃의 시간도 마침내 끝이 난다. 농부들이 트랙터를 이용해 논을 갈아엎기 때문이다. 자운영은 그렇게 한꺼번에 땅에 묻혀 벼 뿌리가 흡수할 충분한 양분이 된다. 덕분에 농부들이 화학비룟값을 아낀다. 덕분에 지구가 기뻐한다. 덕분에 내가 건강한 쌀을 먹는다.      


    살아서는 논 가득 피어 봄을 밝히지, 죽어서는 거름 되어 땅을 튼튼하고 기름지게 하지. 이보다 예쁜 꽃이 또 어디 있을까? 참, 여리여리한 자운영의 어린 순은 나물로도 먹는다. 그리고 꽃은 튀겨도 먹는다. 도대체 버릴 데가 없는 꽃이다. 이만하면 눈물 날 만큼 고마운 꽃 아닐까? 내가 꼭 갱년기라서 이 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 어느 봄꽃보다 더.      




#봄꽃 #자운영 #산형꽃차례 #자줏빛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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