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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Oct 22. 2019

해도 해도 티 나지 않는 집안일

엄마의 위대함에 대하여

퇴사를 하고 나니 집안에 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을 다닐 때는 그저, 잠시 머물고 쉬어가던 공간이었다.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하고 출근을 하면 저녁 때서야 집에 들어오고, 또 금방 밤이 찾아와 잠이 들면 다음날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나와 남편은 주로 주말에 몰아서 함께 집안일을 했고 평일엔 집안일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퇴사 후 집에서 쉰 지 며칠 지나지도 않는데 '와... 내가 집을 이 꼴로 해놓고 산거야?'라는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분명 내 시력은 그대로인데 평소 보이지도 않던 먼지들이 왜 리 잘 보이던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세탁기와 건조기 속에 무심하게 때려 넣던 옷들도 쉽게 망가질까 싶어 갑자기 분리해서 빨기 시작한 나였다.


어느 날 아주 작정을 하고하루 종일 바쁘게 집안일을 했다. 슬슬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옷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밥도 해 먹고..... 그러다 보니 아주 녹초가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식사를 하고 생긴 설거지를 처리하지 못한 채 외출을 했다.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맙소사. 퇴근 후 운동까지 하고 집에 온 남편이 설거지를 해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나는 집에서 놀고 있는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그나마 '난 오늘 하루 종일 다른 집안일을 많이 했어!'라는 색이라도 내어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집을 아무리 둘러봐도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이다. 난 분명히 하루 종일 이 집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는데! 하다못해 직장에서는 보고서라든지 성과라든지 기록이라도 남길 수 있는 것인데 도대체가 집안일은 남는 것이 없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결국 나는 몸살에 걸렸고 다음날부터 몸져누웠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남편이, 앓고 있는 나를 속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여보, 여보한테서 아픈 냄새가 나."
"아픈 냄새? 그게 뭐야?"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 아플 때 나는 특유의 냄새 같은 거 있잖아."
"아하...!! 나 뭔지 알 것도 같아."

나는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픈 냄새가 뭐였더라.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머릿속에 우유를 데울 때 나는 고소한 냄새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냄새는 엄마를 연상시키게 했다.


엄마는 항상 잔병치레가 많았다. 엄마에게 '몸살'이란 정기 구독해놓고서는 무심하게 계속 쌓여가는 잡지처럼, 아주 흔하고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런 존재였다. 엄마가 앓아누워있을 때 안방 문을 열면 그 '아픈 냄새'가 났다. 살 냄새, 땀냄새, 그리고 쌔근쌔근 뱉는 날숨에 담겨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한데 섞인 그 공기. 엄마 고유의 아픈 향기 같은 것이었다.

종종 아팠던 엄마는 그 몸을 이끌고 어떻게 매일 집안일을 하고 우리를 챙기셨을까.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여도 티도 나지 않는 것을 어찌 그렇게 매일같이 하셨을까.

가부장적인 아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엄마는 언제나 우리 식구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직까지도 내가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은 새벽부터 일어나 따듯한 아침밥을 차려주던 엄마가 주신 소중한 습관이다. 3살 터울의 오빠가 유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 식구는 넷이었는데도 그 많은 집안일은 엄마가 혼자 다 하셨다. 여기서 '식구(食口)'라는 한자를 풀어서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먹는 입'이 넷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먹는 입은 넷인데 먹여주는 사람, 치워주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는 뜻이다.

엄마는 꽤 오랫동안 전업주부였다가 내가 고등학생이 된 후에 일터로 나가셨다. 사실 말이 전업주부지, 엄마는 다른 일들로도 항상 바쁘셨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 머리를 싸매 공부했고, 매번 장학금을 받아오셨다. 그 이후에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셨는데, 온갖 신경성을 다 가진 엄마가 감당하기에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두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찾아간 병원에서는... 무려 머리에 주사를 놓아주었더랬다. 그 주사가 너무나도 아픈데도 맞고 나면 한결 나아진다며 꿋꿋하게 공부를 하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피나는 노력에 응답하듯, 그녀는 자격증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이렇게 바쁘고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는 항상 우리의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셨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같은 국이 이틀 이상 지속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반찬은 언제나 상을 가득 채웠다. 본인은 같은걸 계속 먹는 것이 싫다는 핑계를 대며 항상 우리에게 지극정성으로 밥상을 차려주시곤 했다.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 집은 맛집으로 유명했다. 학창 시절, 부모님은 내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을 무척 환영해주다. 워낙 편하게 대해주신 덕에 우리 집은 마치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올 때마다 엄마는 파스타, 떡볶이, 닭볶음탕 등등의 요리를 뚝딱뚝딱해주셨고 친구들은 항상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 시절 엄마 덕에 쌓은 우리 집에서의 추억은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곤 한다. 무엇보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뜨끈하고 맛있는 엄마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꼭 덧붙여지곤 한다.
 
이런 따듯하고 감사한 이야기들을 줄줄 쓰는 지금 사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엄마의 힘들었던 그 모습들이 너무 선명해서, 이 글이 쉬이 쓰이는 것에 더욱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 늘어날수록 나의 마음도 아려온다. 당신이 아픈 와중에도, 내가 감기에 걸리면 배의 한가운데를 뚫고 꿀을 넣어서 정성스레 달여주던 엄마였다.
아,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매일 외로우셨을까.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우리 식구들에게 섭섭해하셨다. 출근을 하신 뒤로부터는 시간도 부족했을뿐더러, 하루하루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셨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나도 가끔 집안일을 했으나, 사실 그 당시 우리 식구들은 엄마를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가령,
"아니, 내 눈에는 집이 정말 깨끗한데. 꼭 이렇게 자주 청소를 해야 하는 거예요?"
"엄마, 이제 우리 외식도 자주 하고 그래요. 왜 그렇게 아프면서까지 밥상을 차리시는 거예요."
따위의 이야기들을 종종 하곤 했던 것이다.

엄마의 눈에도 지금의 나처럼 먼지가 잘 보였겠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먼지를 혼자 감당하며 매일 닦아내느라, 또 알게 모르게 우리 몸에 건강하게 쌓인 그 음식들을 정성 다해 차리느라, 그 약한 몸이 부서지셨겠지.
아, 나는 결혼 후에도 간단한 집안일만 하고 사느라 그 마음을 잘 몰랐다. 그저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따끈한 엄마 밥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에 대해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주부가 되어보니 이제야 조금 더 엄마의 마음을 알겠다. 조금이나마 말이다.



평소 표현을 잘 못하고, 집안일이라고는 절대 하기 싫어하는 우리 아버지도, 내가 결혼을 한 뒤 엄마와 둘이 살다 보니 조금씩 변하고 계신 것 같다.

얼마 전, 엄마는 또 아팠다. 아픈 와중에도 매 끼니 아빠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것에 대해 엄마는 화가 밀려왔다. 물론 엄마가 자발적으로 차린 것은 사실이다만, 아빠는 엄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요리를 해도 그저 당연하게만 행동하 분이셨다. 엄마는 결국 쌓여온 울분이 터져버렸다.
"당신은 내가 아픈 채로 힘들게 밥을 차려도 수저 하나도 안 놓아주고....!! 아니, 그리고 어쩜 아픈 사람한테 죽 한 번을 못 사다 줘요?"
그런 엄마의 이야기를 듣던 아빠는, 오히려 엄마에게 큰소리를 치셨더란다.

그렇게 언성을 높인 뒤 엄마와 아빠는 차가운 마음을 지닌 채 잠이 드셨다. 다음날 엄마는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는데, 옆을 돌아보니 아빠가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 꼭두새벽부터 또 운동 나갔구먼. 하여간 부지런해.'라고 생각하며, 엄마는 다시금 잠에 들었다. 그리고는 몇 시간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침 밥상을 차리러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아빠는 두둑한 빵 봉지를 엄마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한다.

"일찍 죽 집에 갔는데, 아홉 시 반은 돼야 문을 열더라고. 주변을 찾아봐도 사 올게 마땅치 않아서 빵이라도 사 왔어요."

문이 굳게 닫힌 죽 집 앞에서 어찌하나 고민하셨을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니 엄마는 웃음이 나왔다. 본인의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엄마에게 빵을 한 아름 안겨드리는 그 모습은, 엄마 속에 쌓여있는 응어리들을 어느 정도 녹여주었다.



렇듯 우리 식구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위대함'이란 도저히 머리로만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해있. '대체 엄마는 어떻게 이런 희생을....'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하고 애 낳아보면 너도 다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느낀다.  오로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분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일상,

집안에 먼지를 발견하고 문득.


커버 사진/ 꽃 위로 떨어진 가을 낙엽. 필름 카메라 MINOLTA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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