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주스 먹는 순간부터 최고로 행복했어!

엄마의 갈증

by 온정

1년 전쯤, 부모님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파트지만 산속에 위치해있어 자연친화적이고 공기 역시 상쾌한 곳.


그 동네에 살기 시작하며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엄마였다. 근처 성당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 엄마는 종종 그분들과 어울려 다녔다. 수다 떨면서 밥도 사 먹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고, 각자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일상 같지만, 사실 엄마의 활동적인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딸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따름이었다. 몇십 년 간 엄마는 자의로, 타의로 혹은 환경으로 인해 바깥 활동을 많이 못하셨기에. 팔레트 한쪽에 쭈우욱 짜 놓고 공기에 오래도록 노출된 파란 물감처럼, 엄마의 머릿속은 그토록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그 물감도 물 탄 듯 제법 부드럽게 풀려갔다. 그 과정에서 다른 색 물감과도 섞이며 제법 다채로워져 갔다.

엄마는 친구들과 동네 뒷산으로 매일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다. 체력이 워낙 약해서 엄마만 뒤쳐져서 걸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즐겁다고 하셨다. 운동하고 나면 가끔 몸살이 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뿌듯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다 근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일 거라며 엄마를 응원했다.

엄마의 얼굴에는 점점 생기가 돋았다. 산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초록색 나무들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온몸을 정화한 덕이었다. 살이 빠지기 시작하니 엄마는 운동에 더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전화기 너머로 씩씩한 목소리로 자랑을 하곤 하셨다.

“엄마 오늘도 운동 다녀왔다!!!”

드디어 엄마가 건강해지겠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엄마는 뒷산 오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적응을 하긴커녕, 산에서 돌아오고 나면 앓아눕는 일이 잦아졌다. 운동 예찬론자인 아빠는 그게 다 운동을 충분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며 잔소리를 하셨다. 엄마는 다 알아서 하고 있다며 받아치셨다. 그렇게 본인의 몸 상태도 모른 채 꾸역꾸역 산에 오르던 엄마. 더위라도 먹은 탓일까. 그때부터 엄마는 끝없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특이하다니깐. 물을 하루에 몇 리터씩 먹어도 갈증이 사라지지를 않아. “

처음엔 별 걱정이 안 되었다. 갈증이 나면 수분으로 채우면 되지, 라는 단순한 해답이 있었기에. 하지만 이 원인 모를 갈증병은 엄마를 일상생활이 어려운 수준까지 끌고 가 버렸다. 물을 끊임없이 마시고 화장실을 끊임없이 들락날락해야만 했다. 입이 말라서 대화를 오래 하지 못했다. 입 속에서는 자꾸 콜라를 불러댔다. 막상 마시고 나면 입 속이 달아져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음료수 때문에 살이 찔까 봐 전전긍긍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루 종일 물과 음료수를 마시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해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기가 막힐 일이었다.

음료수에는 안 좋은 성분들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식구들은 엄마가 음료수 마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엄마는 “어이쿠! 우리 딸한테 들켜버렸네. 엄마 또 혼나겠네.”라고 하셨다. 부모 속도 모르고 매일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숨어서 불량식품 먹다가 들킨 아이. 엄마는 딱 그런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요즘 아침에 눈뜨면 내 몸에 어떤 음료수를 충전해줘야 할까?라는 생각부터 들어.”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속은 타들어갔을 터. 엄마의 장기들에 방수막이라도 생긴 걸까. 어째 물을 마시는데 흡수는 안되고 그저 스쳐 지나가버린단 말이냐. 어리둥절하는 새에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엄마의 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온갖 병원들을 순회하며 원인을 추적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엄마의 기력이 몹시 쇠해졌다는 한의사 선생님의 말. 억지로라도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몸무게가 늘까 봐 걱정만 늘어갔다.

속상했다. 대체 왜..... 우리 엄마, 이제야 좀 건강해지고 즐거워지려는데 왜....



엄마가 계속 마음에 밟혔던 날들. 난 엄마를 모시고 베트남 호이안으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편과 이미 두 달 전에 다녀왔기에 지리도 빠삭하겠다, 날씨도 딱 좋은 가을 날씨겠다, “엄마는 몸만 따라와요. 아,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겠다는 의지도 함께!” 난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행 중에도 엄마는 역시 갈증 때문에 힘들어했다. 나는 배낭 속에 물을 몇 통씩 넣고 다녔는데, 그 물은 금세 동나곤 했다.

“딸, 이번 여행 동안은 엄마 마시고 싶은 거 맘껏 마실 수 있게 해 줘.”

알겠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첫 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우린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테이블 위에는 알록달록한 과일 주스가 네댓 종류 진열되어있었다. 엄마는 그중 빨간 수박주스를 쪼로록 따라서 맛보시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온정아! 눈이 확 떠지는 맛이야!!!”

아이처럼 좋아하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수박주스만 네 잔을 드셨다. 괜히 코끝이 시큰시큰. 찡해졌다.

오후에는 엄마와 한량처럼 쉬기 위해 근처 바다로 향했다. 바다가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 겸 바에서 시간을 탕진하기로 했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대나무 빨대가 꽂힌 노란 망고주스를 한껏 들이키더니 벌떡 일어나셨다.

“바다까지 왔으면 발을 담가야지!!”

엄마는 주섬주섬 신발을 벗더니 바다로 향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나도 그 뒤를 쫓아가 엄마 손을 맞잡았다. 엄마는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시고는 꺄르르 웃으셨다. 오랫동안 앓느라 어딘가 지쳐있는 엄마의 얼굴. 그 무겁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오늘 아침에 수박 주스 먹는 순간부터, 최고로 행복해졌어!!”
엄마는 내 손을 꼬옥 붙잡고, 푸른 바닷물 아래 깔린 고운 모래알을 풍덩풍덩 밟으며 외쳤다.

“엄마. 우리 엄마, 너무 아름답다. 예쁘다. 정말로.”
나는 따스한 햇빛 아래 활짝 웃는 엄마 얼굴의 주름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으이구, 무슨 소리. 네가 색안경을 끼고 봐서 그런 거야.”
엄마는 부끄러웠는지, 나의 핑크색 선글라스를 가리키며 답했다. 눈시울이 시큰시큰. 찡해졌다.

그 뒤로도 엄마는 여행 내내 기력이 떨어져서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기운을 차리고 즐거워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하루는 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온정아, 엄마 맥주가 마시고 싶어...’라고 말씀하셨다. ‘맥주 마시면 갈증이 더 나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일탈은 필요한 법이니까. 대신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니니 기왕이면 좋은 맥주를 맛 보여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투본 강이 흐르고, 그 강을 따라 양 쪽에 알록달록한 풍등을 달아놓은 상점들이 줄지어 서있는 호이안 올드타운. 그중 아늑한 수제 맥주 집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다.


호이안의 풍등. Sony a5100으로 찍다.


“엄마, 오늘 고삐 풀린 날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놀아봅시다!”

흑맥주, 페일 에일... 풍미가 남다른 수제 맥주들을 맛보며 엄마는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맥주는 난생처음이야. 신세계다, 정말로. 갈증 채우는 일이 최대 관심사였던 엄마에게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일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 맥주는 한몫했다. 아니, 사실 크게 두 몫 했다. 맥주 두 잔을 마신 뒤 취기가 조금 오른 엄마는 이런저런 고충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을 한 뒤에는 본인이 짐이라도 될까 봐 힘들어도 아파도 무조건 괜찮다는 말로 넘겨버리던 엄마. 이 날 엄마는 오랜만에 두서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엄마의 고단한 심정들을 토로하셨다.


엄마는 본인이 심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힘든지, 힘든 원인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을 못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엄마의 입에서는 마음의 결석들이 언어의 형태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상처, 인내, 책임감, 의무감 따위들이, 엄마의 마음을 꽉 막아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이야기들은 엄마의 입술을 더욱 바싹 마르게 했다.


아. 그동안 경직되어있던 엄마의 신경계가 이제 좀 활발하게, 즐겁게 활동해보겠다는데. 그마저도 맘처럼 되지 않는 현실. 이내 머리가 시큰시큰. 찡해졌다.

왠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갈증.... 그건 혹시 마음의 갈증은 아니었을까. 투본강 위로 반사된 풍등의 불빛들이 물결 따라 울렁거렸다.



커버 사진/ 베트남 호이안에 흐르는 투본강. 필름 카메라 OLYMPUS PEN EE-3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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