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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24. 2022

미치코 런던의 그녀는 정말 런던에서 살고 있었을까?

어쨌든 이쯤이면 잘 산 인생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짝이었던 나와 K는 대학생도 되었겠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 중 한 곳은 영국 런던(London)이었고 그 도시는 우리 둘 모두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소위, 주요 관광지라고 알려진 곳들을 다시 한번 부지런히 둘러볼 의지가 전혀 없었던 우리는 한낮의 공원에 하릴없이 앉아 있던 참이었다. 여기도 이미 봤고 저기도 가봤는데 이제 뭐하지?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부터 여성 한 분이 우리 쪽으로 발걸음도 단정하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생김새며 스타일이며, 한눈에 딱 봐도 일본인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일본에서 왔다는 그녀는 진짜로 나와 K가 앉아 있는 벤치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이후, 지루함의 나락으로 나가떨어질 뻔했던 우리의 오후는 아슬아슬하고도 성스러운 종교 대화합의 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일본 출신 런더너께서는 나와 K에게 잠깐 시간이 괜찮냐고 물었다. 그리곤 있는 건 시간뿐이었던 우리의 반응을 보고는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셨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먼저 말을 거는 일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토록 기독교에 심취한 일본인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이렇게 먼저 찾아주시니 감사할  지경이었으이미 각자의 종교가 있는 우리가 멀리 유럽에까지 여행을 와서 남의 종교 이야기를 듣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반응은 점차 뜨뜻미지근해질 수밖에. 그러나 선교를 목표로 하시는 분이 쉽게 물러날 리는 없지. 변화를 감지한 일본 출신 런더너께서는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고야 만다.


"미치코 런던, 아시?"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아닌지라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십 대였던 시절에 미치코 런던(Michiko London)이라는 브랜드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멀리에서 봐도 한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커다랗게 미.치.코.런.던.이라는 글자를 박아 넣은 티셔츠며 양말을 마치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걸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브랜드 제품을 몇 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입을 때면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 어디에서 만든 것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미치코는 일본 사람 이름 같고 런던은 영국 런던일 텐데 이 브랜드를 만든 사람은 런던에 사는 일본인일까, 아니면 일본을 좋아하는 영국 사람일까?


내 발목과 무릎 중간까지 올라오던 양말에 세로 쓰기로 큼지막하게 수놓아져 있던 그 이름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미치코 런던을 알고 있냐는 질문은 서서히 흥미를 잃어가던 나의 마음을 단박에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여전히 우리 앞에 서 계시던 그분은 미치코 런던의 창업자인 미치코 어쩌고 상(さん)이 다니는 교회에 우리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 공원 바로 옆에 있대도 갈까 말까인데 심지어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 기차를 타고 런던 교외 지역으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우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없는 자들 앞에서 두려움은 심심함에게 겨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 목사님 부부가 집에서 운영하는 작은 교회이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기차표도 사 줄 테니 당신들은 몸만 오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쩌면 그 미치코 어쩌고 상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우리 둘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기차에 올랐다.


이어지는 시간들은 아슬아슬했다. 나와 K는 일본인 목사님 부부의 집 뒷마당에 있는 수영장에서 침례를 받았고 집 한 구석에 마련된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제와 밝히는 것이지만, 정식 침례를 받기 위해 몸에 붙은 장신구를 다 떼어내는 것은 물론, 속옷까지도 싹 다 벗고 목욕가운만 입은 채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우리 둘은 오면 안 되는 곳에 따라온 건 아닐까 무서워 벌벌 떨다가 결국 찍소리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 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침례를 받고 들어선 예배당에서는 목사님의 사모님이 연주하시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일본어를 와따시와 어쩌고 저쩌고 발음 나는 대로 영어로 옮겨 적은, 무슨 말인지 모를 성가를 따라 부르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우리 둘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진행되는 예배에, 그것도 런던 외곽, 정확히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동네의 일본인 목사님 댁에서 열리는 성스러운 시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어서 기어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신자라고는 나와 K, 그리고 우리를 그곳에 데리고 간 일본인 런더너, 단 셋 뿐이었다. 한 번 터져버린 웃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숨죽여 웃느라 K가 성가를 전혀 못 부르고 있는 마당에 나마저 웃음이 터져버리면, 그래서 나까지 덩달아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다 들통나버릴 텐데. 안돼, 웃으면 안 돼, 나까지 웃으면 안 된다고!!

슬픈 생각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소환해 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도 소용없었고 허벅지를 아무리 꼬집어도 좀처럼 화가 나지도 슬퍼지지도 않았다. 결국 오래전 저 세상으로 떠나신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다녀가시고 피멍이 든 허벅지만이 나에게 남겨졌을 즈음 할렐루야, 드디어 예배가 끝이 났다. 다행히, 하느님이 도우셨는지, 아니면 미치코 런던이 도왔는지, 그 후, 목사님의 사모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딸기 케이크를 곁들여 차까지 한 잔씩 얻어 마신 우리 둘은 런던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날 우리는 미치코 런던의 창업주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궁금하긴 하다. 미치코 어쩌고 상은 정말로 런던에서 살고 있었을까? 참말로 우리가 다녀온 교회엘 다니고 있었을까? 우리가 침례를 받은 수영장에서 그녀도 침례를 받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정원이 바라보이는 창가 식탁에 앉아 딸기가 들어간 쇼트케이크를 먹었을까? 하긴,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며칠 전, 오랜만에 K를 만났다. 지금 뒤돌아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에 눈물과 웃음을 나누 10대와 20대를 지나 이제는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는 40대에 이른 우리 둘. 몸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한 교실, 앞 뒤 자리에 앉아 붙어 지내던 과거에 비해 자주 만나기는 어렵지만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볼 때면 나는, 켜켜이 쌓인 우리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나와 K에게도 검은색 머리카락보다 하얀색 머리카락이 더 많아지는 날이 올 테지. 그런 날이 온대도 나는 K를 만나면 언제나 예전의 소녀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얻고 싶었지만 놓친 것들, 이루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들 때문에 가슴 아픈 날들도 있지만 이런 친구와 삶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 어쨌 이쯤이면 잘 산 인생 아닐까?


수 년 후, 남편이 찍어준 나와 K의 뒷모습. 그러고 보니 이번엔 성당이네?
우리가 각자의 배우자를 동반해 함께 여행했던 미국 아리조나 세도나(Sed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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