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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사의 아침편지] 차분한 고요함이 그리웠어요.

by 나무둘

어제는 마음이 착잡해서 밤늦게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우리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은 참 좋아요.

늦은 밤 아무도 안 다니는 숲길.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점점이 비춰주고 있는 길.

환하게 다 밝히지 않은 그 길이 편안해요.


뻔히 다 드러나는 인생살이보다는

어딘가 후미지고 구석져 다 알 수 없는

그 신비를 사랑하는 마음일까요?

인생은 원래 미스터리라고 하잖아요.


고요한 가운데 내 발소리만 들리는 그 시간

내 마음도 낙엽처럼 눈처럼 비처럼 차분히 가라앉았어요.

차분한 고요함.

내게 필요한 전부가 이것이었더군요.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이 책 저 책을 더듬어 봤어요.

아 이런 맛이었군요.

집에 쌓인 책, 특히 심리학 책들만 보다가 온갖 책들을 더듬어 보니

마음이 좀 더 편히 쉴 수 있었어요.


자리에 앉아서 잠시 책을 보기 전에

오늘의 불편했던 감정에 대해 끼적였어요.

밤늦게 도서관에 찾아온 이유가 사실은 그것이거든요.

불편한 감정을 완전히 끝장내 보자고 쓰기 시작하지만, 웬걸요.

늘 깨닫게 되는 것은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감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휘발유처럼 증발해버려요.


그렇게 사라지고 만 감정을 어떻게 만져보려고 하다가

이내 펜을 내려놓아요.

이미 사라졌거든요.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진 감정을 붙잡고

무슨 글자든 더 써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것, '지어내는 환상'같은 거예요.


그러고 돌아보면 참 희한해요.

내가 이런 감정과 하루 종일 씨름을 했단 말인가.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요.

이렇게 쉽게 빨리 사라질 것을.

나는 왜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던 것인가?


심신이 고갈된 느낌으로 며칠을 살면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정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방향감각을 잃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내게 필요한 것은 고작, 고요함이었어요.

차분한 고요함.


열심히 살겠다고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내고 하는 이야기들.

깊이 감촉해서 표현하고 표출해내려고 하는 이야기들.

결국은 그냥 다 '이야기'일뿐이에요.

내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 더 멋진 이야기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이야기가 보이고 들려서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아무 말이 탄생하지 않는 곳.

말이 탄생하려고 하자마자 즉시 사멸하는 곳.

그 고요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조차

잊고 살았었나 봐요.


더 빨리 더 많이 매일 부지런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려서

지금처럼 자판을 쳐대며 나를 잃었던 거예요.

이쯤 되면 요새 유행하는 치유하는 글쓰기 대신

'나를 잃게 만드는 글쓰기'도 말이 되겠네요.


그렇게 고독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가운데

감정을 쓰고 책을 읽고 마음을 정리했어요.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이상하게 기력이 생긴 느낌이 들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화이팅하려고 했을 때는 아무리 해도 화이팅이 안 됐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 청소를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옆집 할아버지가 보였어요.

매일같이 쓸던 거리에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옆집 할아버지.

눈인사나 인사말만 주고받을 뿐이었지만 괜히 걱정이 되었어요.


날씨가 추워서 안 나오신 걸까?

어디 아프신 걸까?


오늘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길거리를 청소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제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첫사랑만큼은 아니지만 기다리던 연인을 만나는 마음 같았어요.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조금 먼 곳에서 봐서 인사를 나는지는 못했지만 정말 반가웠어요!

마음으로는 기쁘게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마치 소생하기 시작한 내 마음을 다시 보는 것 같았어요.

종적을 감췄다가 다시 등장한 할아버지.

내 마음을 대변해서 그리 나타나 주신 것 같았어요.


어젯밤 도서관에서

그리고 오늘 아침 길거리의 할아버지에게서

난데없이 희망을 느꼈어요.


그건 정말 난데없는 거예요.

완전히 끝난 것 같은 가운데에도

난데없이 마음에 불이 켜지기도 한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에요.


어느덧 겨울, 이라고 하듯이

문득 봄, 이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요.

아무 가망이 없는 곳에서도

'문득' 희망이 온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요.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쥐 죽은 듯 살지만 소생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아무 강요도 없다면 다시 샘솟을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우리 마음이 겨울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가장 깊은 고요함에서 시원한 샘물을 길어 올리면 좋겠습니다.

춥고 어둡고 조용한 겨울은

차분하고 고요하게 나를 만나기에,

봄을 희망하기에 좋은 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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