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같은 걷기, 올레 6코스

혼자 걷기 좋은 길

by 정안

바람이 많이 부는 추운 날 난이도 최고인 9코스에 다녀온 후유증으로 감기에 걸렸다.

저녁에 걱정하면서 잠들었는데 다행히 아침에는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었다. 타이레놀 한 알과 뜨거운 전기장판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저녁 8시부터 잔 잠의 효과가 가장 컸다.


올레스테이에서 진행하는 '제주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그 첫날이었다.

전날 저녁에 참여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 10코스를 걷고 늦게 도착한 나는 참여자들의 자기소개를 듣지 못했다. 아쉬웠다. 프로그램에는 16명이 참여했는데 부부 2팀, 모자 1팀, 친구 2팀 그리고 6명은 혼자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50대~60대였다.


첫날은 6코스를 봉사자와 함께 걷는 것이었다.

6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었다. 제주 올레 여행자 센터에서 출발해 정방폭포를 거쳐 쇠소깍까지 가는 10킬로미터의 평이하고 짧은 코스였다.


봉사자는 올레길 초보인 사람들을 앞장 세워서 올레길 표식과 리본 보는 법을 실습시켰다. 그러면서 가장 못 걷는 사람을 기준으로 걷겠다고 안내했다. 그러면서 잘 걷는 사람은 천천히 갈 수 있지만 못 걷는 사람은 노력해도 빨리 갈 수 없기 때문에 못 걷는 사람에 맞춘다고 했다. 맞다. 적극 공감했다.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을 거쳐 이중섭이 11개월 동안 머물렀던 집으로 갔다. 방이 정말 작아서 4명이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중섭에게는 가족이 함께 살았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있는 집이었다. 그 후 가난 때문에 부인과 아이들은 일본에 있는 처가로 가서 살게 되었다. 오랜 세월 가족을 그리워했던 이중섭의 절절한 작품이 생각났다. 바로 옆에서는 이중섭 미술관이 신축 중이었다.


정방폭포를 거쳐 해안길을 걸어 중간 스탬프가 있는 소라의 성에 도착했다. 소라의 성은 예전에는 여행자 센터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2층 북카페만 운영하고 있다. 바다 전망이 아름다운 북카페라고 한다.


바닷길을 걸어 소천지에 도착했다. 소천지는 백두산 천지를 축소해 놓은 모습과 비슷하여 소천지라고 부른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소천지에 투영된 한라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호수 같은 모습이었다. 눈으로 볼 때는 흐린 물이었는데 사진을 찍으니 정말 백두산 천지와 많이 닮은 풍경이 되었다. 이날은 날씨가 흐려서 한라산의 모습이 물속에 비치지는 않았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걷다 보니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레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언제 오셨냐, 어디서 왔냐, 몇 코스 걸어봤냐 이다. 더 심화과정으로 들어가서 개인적인걸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정도 물어본다.


그런데 묻고는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거나 듣고도 나중에 다시 만나면 같은 걸 물어본다. 흘려듣기 때문이다. 이런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에 와서 좋은 친구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오는 사람도 있고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끈끈한 유대감이나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형태이든 걷기 위해 만난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봉사자분의 배려심으로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충분한 점심시간과 카페에서의 여유 있는 시간으로 3~4시간 걸리는 올레 6코스를 7시간 동안 걸었다. 나는 감기가 점점 심해져서 콧물을 닦느라 바빴다.


봉사자분은 제주에서 용천수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여러 번 설명해 주었다. 용천수는 땅속을 오랫동안 흐르던 빗물이 바위틈을 뚫고 솟아나는 물을 말한다. 이 물이 없었다면 제주도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용천수는 마을의 중심이다. 용천수가 나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제주의 용천수는 독특하게 바닷가에서도 솟는다. 바닷물 속에서도 민물이 올라오는데 이 때문에 바다 일부가 차갑고 맑다. 대표적인 곳이 쇠소깍 근처이다. 효돈천의 물과 지하수가 만나 특유의 깊은 색을 만든다.


종점인 쇠소깍에 도착했다. 쪽빛의 물 위로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있었다. 청년 둘이서 카누를 타고 흔들면서 장난을 치다 안내자에게 주의를 듣는 모습이 보였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종점 스탬프를 찍고 버스를 타려고 보니 금방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서 오랜만에 숨차게 뛰었다. 겨우 버스를 잡아타고 다 같이 돌아왔다.


숙소에 가기 전 병원에 들렀다. 계속 걸어야 하는데 감기로 앓아누우면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병원에 들어갔더니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는 병원 옆에 노래방이 있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알고 보니 환자가 없는 시간에 의사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냥 혼자 조용히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이크에 대고 부르는 소리였다. 참으로 희한한 병원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증상을 묻고 약을 아주 세게 지어주셨다. 약을 먹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거뜬해졌다. 제주에 와서 병원까지 가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