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향 가득한 올레 14-1코스

곶자왈에 가득한 제주 백서향의 향기

by 정안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 여행자센터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어제 마무리했던 '제주에서 일주일 살기' 참여자들의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서로의 일정을 묻고 응원하는 마음이 따뜻했다. 첫날부터 유난히 리액션 좋고 밝았던 분들이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제주에 와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나 일주일 사이 정이 들었다. 사람은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이다. 함께 무언가를 하기만 해도 이렇게 헤어질 때 애잔한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서귀포에 있는 올레여행자센터에서 저지리 숙소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했고 시간도 많이 걸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두고 14-1코스를 걷기 위해 아카자봉을 신청해 두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아침을 거의 다 먹어가서 5분 이상 걸릴 줄 알고 택시를 불렀는데 택시가 바로 잡혔다. 급하게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타러 나오는데 모두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응원해 주었다. 게다가 센터장님은 문 앞까지 나와서 잘 가라고 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 따뜻함을 품고 나도 그분들을 응원하며 떠나왔다.


저지리 숙소에 짐을 두고 그 택시를 다시 타고 14-1코스 종점으로 갔다. 역방향으로 걷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오설록 티뮤지엄 앞에선 아홉 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옆에 있는 녹차밭 한가운데 파란색 간세가 보였다. 봉사자 두 명과 참여자 여덟 명, 이렇게 열명이 모였다. 간단한 체조를 했다. 걷기 전 체조는 봉사자에 따라 형태가 달랐다. 봉사자는 식물과 지형에 대해 해박한 분이었다. 그리고 봉사자들과 참여자 몇 명이 안면이 있는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올레 14-1코스 역방향은 오설록 녹차밭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 이상 이어지는 울창한 곶자왈을 지나 문도지 오름 출구에 있는 중간 스탬프를 찍고 저지예술정보화마을 미센터에서 마무리하는 코스이다. 9킬로미터로 비교적 짧은 코스이다.


역방향은 녹차밭에서 바로 곶자왈 숲 속으로 들어갔다. 현무암과 무성한 숲이 바로 시작되었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 속은 아름다웠다. 나무에는 마치 콩을 두 개로 쪼갠 것 같은 모양이라 하여 '콩짜개 덩굴'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나무를 감싸고 있었다. 콩짜개 덩굴은 나무와 공생관계라고 한다. 콩짜개 덩굴은 습기가 있는 현무암에서도 자라고 있었다.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제주말로 곶자왈이라고 한다. 보온 보습 효과가 있는 곶자왈은 북방 한계 식물과 남방 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다. 한겨울에도 푸른 숲인 곶자왈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생태계의 허파역할을 한다.


걷는데 숲 속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제주백서향의 자생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겨울이 끝나는 2~3월에 피는 꽃이다. '흰꽃에서 상서로운 향기가 난다'는 의미의 제주 백서향은 작은 흰꽃이 잎과 함께 핀 소담한 나무였다. 가장 압권은 꽃에서 나는 향기였다. 숲 속이 향기로 가득 찼다. 제주 백서향을 만나고 그 향기를 맡은 것만으로도 올레 14-1코스를 걸은 보람이 있었다.


중간에 제주 도민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주거용 동굴인 '볏바른 궤'가 나왔다. '궤'는 제주어로 작은 규모의 바위굴을 뜻하며 곶자왈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들어가서 불을 비추니 규모가 큰 동굴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제주 4.3 때 곶자왈은 울창한 숲과 궤, 동굴이 있고 가까이 마을이 있어 주민들의 피난처뿐만 아니라 무장대의 근거지, 때로는 토벌대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곶자왈에는 말똥이 많았다. 중간에는 오래전에 죽은 말의 머리뼈가 백골상태로 있어 놀라기도 했다. 중간 스탬프 지점을 지나 말 목장에서 봉사자가 사연을 하나 이야기 해주었다. 원래는 문도지 오름을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는 길이 사유지라고 했다. 말 목장을 하고 있는 사유지 주인을 (사)올레에서 오랜 세월 설득해서 통행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던 사람이 말에 물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 사람이 말주인을 고소했다. (사)올레에서 비용을 다 대고 소송을 수행해서 결국은 승소했다고 한다. 말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물지 않는데 그 사람이 말을 괴롭혀서 물린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고소를 당한 말 목장 주인은 다시 사고가 생길까 걱정되어 통행로를 막았는데 승소를 하면서 조금 마음을 풀고 개인의 통행은 묵인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단체로 통행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어 우리는 문도지 오름에 올라갈 수 없었다.


중간에서 쉬는데 봉사자가 이것저것 담은 간식 봉지를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다른 참여자는 제주 당근을 잘라와 하나씩 나줘주고 다른 분은 볶은 콩을 나눠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나는 짐을 숙소에 던져넣고 오기 바빠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봉사자분은 올레길을 걷거나 한라산을 올라갈때 꼭 간식을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중간에 기력이 갑자기 떨어져서 곤란해질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


돌길의 곶자왈을 벗어나 편안한 길로 나왔다. 양 옆으로 숲이 펼쳐지고 청보리밭이 돌담과 잘 어우러져 있다. 양배추를 수확하는 밭의 모습과 드문드문 유채꽃도 활짝 피었다. 제주의 길가에 많이 피어 있는 작은 보라색 꽃의 이름을 물어보니 '광대 나물'이라고 했다. 이파리가 광대가 입는 옷의 너풀한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름을 붙인 누군가의 세심한 관찰력이 놀라웠다. 이렇게 식물의 이름과 그 이유를 듣는 것도 올레길을 걷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마을길을 한참 걸어서 종점에 도착했다. 아홉 시 삼십 분에 시작했는데 오후 한시쯤 일정이 끝났다. 근처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대기를 한 후 식사를 하는데 고등어조림과 갓 튀긴 신선한 갈치가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주변을 둘러보고 숙소에 돌아오니 오후 세시였다. 포근하고 기분 좋은 침대에서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올레여행자센터에서 숙소를 이동할 때 올레패스앱에서 코스마다 추천하는 숙소 중 한 군데를 예약했다. 저지리 농촌체험휴양마을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덤부리 스테이'였다. 13, 14, 14-1코스를 모두 이곳에서 출발하거나 이곳이 종점이라 아주 좋은 위치였다.


게다가 숙소가 새로 지었거나 리모델링을 했는지 정말 깨끗했다. 마알간 공간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방은 혼자 쓰기 아까울 정도로 널찍한 공간에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공용주방과 세탁실도 있다. 주변에는 식당이나 카페, 편의점이 여러 군데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포근한 침대에 누워 동백나무와 저지오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숙소에서 3박을 한다는 게 기분 좋다. 다음에 제주에 오면 이곳은 꼭 오려고 한다. 숙소 자체가 좋다. 오늘 밤 기분 좋게 잠들 것 같다.


내일은 올레 14코스에 간다. 아카자봉이 숙소 바로 앞에서 출발해서 여유로운 아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