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다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기
좀처럼 여유 시간을 내지 못해 2주 만에 화실에 갔던 날이다. 하루 24시간, 7일 중에 단 두 시간도 내 시간으로 만들지 못했으니 온전히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누적된 컴퓨터 작업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에 어깨는 천근만근이었지만 골치 아픈 다른 일은 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매번 책에서 샘플을 찾았는데 이번엔 핀터레스트(pinterest)에서 골라 보았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웹페이지였는데, 다양한 일러스트, 도안, 패턴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시선을 끄는 이미지가 가득했다.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특이하고. 색감은 이게 좋고, 모양은 저게 마음에 들고. 능력과 무관하게 소장욕구가 일어나는 이미지들이 많아서 고르기 어려웠는데, 그중에 색감과 모양, 느낌 등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배경에 산뜻한 꽃과 이파리들이 풍성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미지였다.
휴대폰 속 이미지는 액정화면 만한 크기였는데, 막상 작업할 패널을 고르려니 사이즈가 마땅하지 않았다. 화면 속 이미지는 가로보다는 세로로 긴 모양이었는데 어떤 패널은 세로가 너무 길고 폭이 좁았고, 또 어떤 것은 비율이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결국 고르고 골라 하나를 찾았는데, 전체 사이즈가 너무 컸다. 가로 세로 모두 50cm는 족히 넘어서 지금까지 골랐던 패널 중에 가장 큰 사이즈였다. 마음에 쏙 드는 이미지를 고른 것까지는 좋은데 과연 이 큰 패널을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해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한 작업은 바탕을 흰색으로 칠하는 것이었다. 큰 사이즈였지만 패널 가득 깨끗한 흰색으로 채워가는 시간부터 즐거웠다. MDF 패널의 나무색이 새하얀 스케치북처럼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복잡했던 마음도 깨끗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소복소복 눈이 내려 쌓이듯 소란스럽던 마음을 차분하게 덮어주는 느낌이랄까.
다음에는 하얗게 만든 배경 위로 이파리들을 그려 나갔다. 얼핏 보면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것 같았지만 모두 조금씩 달랐다. 줄기를 뚫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이파리도 있고, 꽤 널찍한 이파리도 있었다. 색감은 더 다채로웠다. 초록색이라고 해도 연초록, 밝은 초록, 짙은 초록, 밝은 올리브, 짙은 올리브, 딥그린... 기본 물감에 들어 있는 초록색 계열만도 여러 개였는데, 다른 색과 섞으니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초록 빛깔이 만들어졌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명명하고 한정할 수 있는 언어가 얼마나 제한적이고 빈약한 것인지 조색을 하면서 알았다. 물론 그런 제한과 빈약함 속에서도 정체성을 얻은 색들은 축하할 일이지만.
원본 이미지를 처음 봤을 때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꼈던 것은 같은 모양과 크기와 색깔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꽃과 이파리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색감과 모양이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한 데서 오는 리듬 같은 것이 있었다. 같은 모양과 패턴이 반복되고 일정한 색이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데서 오는 질서와 안정도 느껴졌다. 큰 틀은 공유하지만 색깔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면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율동감이 만들어지는 듯했다.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파리들과는 다른 화려함을 서로 다른 모양과 빛깔을 통해 뽐내고 있었다. 원본 이미지 속 꽃들의 화려함은 주저 없이 색깔을 드러내는 자신감에서 나왔다. 꽃잎 하나에도 수줍음 같은 옅은 빛깔과 대담한 강렬함이 섞여 있었다. 수줍은 분홍빛, 열정 같은 다홍빛, 개성 있는 청포빛이 어우러졌다. 나의 채색은 넘치는 자신감도 아니고 능숙한 노련함도 아니었지만. 비록 원작이 갖는 당당함까지는 기대할 수 없더라도 발랄함은 살리고 싶었다. 다행히 완성해 놓고 보니 전체적으로 산뜻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중고등학교 때 한참 유행했던 헤어스타일이 떠오른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머리카락 길이를 귀밑 7cm로 제한했어서 더 이상 기르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웨이브가 있는 펌도 허용되지 않았고. 쇼커트로 짧게 자르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것도 두상이 예뻐야 가능했다. 웨이브 없는 모발에 길이가 한정되니 또래 친구들과 다른 스타일로 멋을 낼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쇼커트로 차별화하지 못할 바엔 기껏해야 앞머리를 길러 롤빗으로 웨이브를 넣는 정도로 차이를 만들었는데, 웨이브의 굵기나 높이를 조금씩 달리하는 것이 나름의 개성을 살리는 전부였다. 작은 교실 가득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비슷한 가방이 걸려있는 책상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앉아 있던 날들. 지나고 나면 미화되는 것들이 많은 탓인지 그때의 단순하고 개성 없던 시절도 떠올리면 은은한 온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5월이 되어 스승의 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하고 만난 친구들은 모두 다른 헤어스타일이었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 스트레이트 펌을 한 친구, 굵은 웨이브 파마를 한 친구,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며 질끈 하나로 묶은 친구. 앞머리를 부풀린 단발머리를 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졸업 후에 모인 것이니 교복차림도 아니었는데, 옷차림 마저 무릎길이 스커트, 롱 스커트, 슬랙스 차림 속에 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교복이 치마였던 탓에 나는 졸업 후엔 절대 치마 입을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을 했었다. 종아리에 알이 단단한 무다리였던 나로서는 치마를 교복으로 입어야 하는 일은 콤플렉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때 모였던 친구들은 저마다 서로의 스타일을 품평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 다른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었지만 그런 다름이 서로를 더 돋보이게 했던 것 같다.
질서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비슷한 모양과 크기, 유사한 색깔과 패턴은 규칙을 만들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 점, 선, 면과 같이 단순한 형태만으로도 질서와 균형을 추구해 특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몬드리안 같은 화가도 있으니까.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규칙과 패턴은 안정감을 주는 대신에 새로움과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내가 잘 그리지 못하는 솜씨로나마 꽃을 그리고 이파리를 그리는 동안 그 꽃과 이파리가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이라는 점이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사진처럼 원본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사진조차 원본 이상의 창조가 될 수 있지만) 원본과는 다른 나만의 색과 모양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그것 대로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다.
사람이 육체라는 제한된 실재 안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내가 다른 누구와 같지 않을 때, 가장 나다울 때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비슷한 듯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다르고, 그런 다름 속에서 서로의 크기와 모양을 인정하고, 서로의 색을 존중할 때 서로가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것을 조화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