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는 방법

나의 꽃이 피어날 빛의 양과 적정한 온도를 찾기

by 오월의 나무

카페화실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날은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 종종 들었다. 초등학교 때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중에‘이상한 나라의 폴’이 있었다. 폴, 니나, 폴과 니나, 그리고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귀가 날개만큼 큰 강아지와 봉제인형 친구 일행이 등장하는데 얼마나 즐겨 보았던지 아직도 주제가가 생생하다. 어느 날 4차원 세계로 일행이 여행을 떠났는데 니나가 대마왕에게 붙잡힌다. 마법을 걸어 4차원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서 정해진 시간까지는 현실에 돌아와야 하는데, 대마왕에게 니나를 구출하는 일은 그야말로 모험인지라, 매일 현실과 4차원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늘 조마조마하며 봤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카페화실은 그런 곳이었다. 나의 모든 일상은 잠시 멈추고 그곳에서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느낌. 물론 만화 영화에서는 현실이 안전하고, 4차원 세계는 대마왕의 존재가 위험으로 가득했기에 어떤 면에서는 내 상황과는 반대였다. 하지만 4차원 세계에서 대마왕과 맞서는 모험을 통해 과제를 해결하고 성장해 가는 상황은 낯선 그림 작업을 통해 뭔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러 가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를 말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 그리고 싶은 사람, 배우는 사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 시간이 특별했다. 같은 시간에 배우는 분들과는 자주 만났지만 각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가끔 다른 일로 시간을 바꿔서 오는 낯선 분들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서 보다는 각자의 시간에 집중하는 분위기는 한결같았다.


난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애쓰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목적을 위한 관계, 그래서 무언가 탐색을 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어서. 아마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서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나누지 않았지만, 각자의 그림에 대해서는 관심과 응원을 보내고 각자의 시간에 충실했기에 편하고 안락했다.


마법의 시간이 좋아서 나를 위한 두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마법의 시간은 늘 짧기만 했고, 현실 세계의 시간은 만화 영화 속에서 멈춰진 시간처럼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초반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가곤 했지만, 현실 세계에 두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혹은 도저히 마법을 걸 수 없는 날들이 늘어났다. 꼬박꼬박 빠짐없이 가다가 한 주를 건너뛰는 일은 어려웠는데, 건너뛰는 일이 한두 번 반복되니 두 주를 건너뛰는 일은 쉬웠다. 이 날도 여의치 않았지만 이번 주도 빠지면 영영 못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할 일을 제쳐두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22_꽃을 피우는 방법.png 나무 패널에 아크릴 물감과 수채 물감


오랜만에 간 만큼 느긋하게 그려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가장 빨리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두고 가면 이어서 하면 될 텐데 다음 주에 이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업 사이에 시간 간격이 너무 많이 생기면 느낌도 살지 않고, 완성도도 떨어질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던 것 같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작업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의 새 작품이었다. 계절도 마침 가을이라 색감이며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바탕에 칠할 색을 만드는 동안 마법은 이미 시작되었다. 가을이지만 쓸쓸한 건 싫고, 쌀쌀하지만 차가운 건 싫은, 고독하지만 무겁지는 않은 그런 색이면 좋을 텐데. 기대보다는 조금 밝았지만 따뜻하고 묽은 코코아 같은 색이 만들어졌다. 이만하면 됐다. 붓질을 시작하니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전보다 용감하게 칠을 했다.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눈앞에 그럴듯한 세상은 만들어졌는데, 주인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어느 위치에 어떤 크기로, 어떤 색으로 표정을 만들어야 할지. 생각하고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작은 붓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 공을 들인 결과물로 가을 국화 한 송이를 피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서둘러서 무언가를 완성해 가려하면서 주인공으로는 국화를 그리니 기분이 묘했다.


보통 계절을 말할 때 순서가 봄여름가을겨울이다 보니 가을에 피는 꽃들은 꽃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늦게 피는 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 국화는 묵묵히 꽃을 피운다. 봄이 되어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날 때, 화려한 빛깔과 모양을 뽐내며 흐드러질 때도 개성 없는 초록 빛깔에 넓지 않은 이파리로 눈길조차 끌지 못했던 꽃. 다른 꽃들이 자랑하던 찬란함이 사라졌을 때, 이제야 나도 여기 있었다는 것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꽃. 눈길을 끄는 매력이 아니더라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꽃.


같은 계절에 피는 꽃도 같은 가지에서 순서를 달리 피는데, 하물며 사람이 각자의 재능을 꽃피우는 시기가 같을 수가 있을까. 사람이라는 종만 같을 뿐 생긴 모습도 성격도 환경도 다른데 말이다. 중요한 건 언젠가는 각자의 꽃을 피울 것임을 스스로 잊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꽃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이다. 내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필요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채우거나 도움을 청하여 충족하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조금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언젠가는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분명 꽃은 피울 수 있으리라.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면, 꽃 피우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고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과 애정을 쏟아붓는 분야와 시기가 나와 다르더라도 조급해하지 말 것. 누군가에게 어떤 일은 필생을 들여서 열정을 쏟아붓는 일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취미나 단순한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은 내게 성적을 잘 받는 것이 거의 유일한 목적이었다가, 뒤늦게 취미로 즐겼던 미술은 온전히 즐거움으로 기억되었다. 미술을 성적이라는 결과로만 생각했을 때는 전혀 즐겁지 않고, 나에게 없는 소질과 풍족하지 못한 재료들만 탓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내 손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고 어떤 색깔을 입히는 과정으로 생각했을 때는 비록 소질이 없고 재료가 빈약했어도 그저 행복했다. 누군가 앞서 만든 작품이 좋아 보여서 신나게 작업을 따라 하고는, 막상 샘플과 비교하면 결과가 형편없는 지라도 그 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이었기에 즐거웠다. 나에게 미술은 나의 꽃이 아니라 언젠가 피어날 나의 꽃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늦게’라는 표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사람들이 기후에 따라 시기를 나누고 이름을 붙여 놓은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기온이 오르고 싹이 트는 시기인 봄을 계절의 처음으로 정하여 사계절의 처음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맨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시작되는 시기인 봄이 아니라 먼저 준비를 위한 겨울이 우선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생물이 왕성한 활력을 뽐내는 시기를 처음으로 본다면 여름이 먼저라고 해도 무슨 잘못이 있으랴. 하물며 빛의 강도와 세기가 줄어들어 겉으로는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 같지만 치열하게 다음 삶을 준비하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가을이야 말로 진정한 출발이라고 한들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각 시기별로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누군가 지켜본다고 꽃 한 송이가 필 자리에 두 송이가 피지 않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고 인적 없는 곳에서도 꽃은 피고 있다. 남들이 정해 놓은 때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꽃 피워야 할 시기에 피어나면 좋겠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우리 각자는 모두 꽃이라는 것뿐. 어떤 빛깔과 모양과 향기를 가진 꽃이건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게 준비하는 것뿐.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해 준 마법의 세계에 계속 머물고도 싶었다. 하지만 마법의 세계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 세계와 대비되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마법 세계에서 느꼈던 것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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