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건 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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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5일 오전 9시 30분 (목) - 서울특별시 금천구
이지민, 26세
대화할 때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소극적이며 말이 없는 성격.
얼핏 스펙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들었지만, 통 말이 없어 와닿지 않는다.
뭐, 확실한 건 얼굴이 예쁘다.
인턴 입사 열흘째, 오늘 이 사람과 둘이서 현장 조사를 나간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기업의 인턴들에게 '백화점 현장 조사'는
영업 과정 파악을 위한 필수 과목이며,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들은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2인 1조로 수첩과 볼펜을 들고선 백화점으로 출근했다.
''
"저희 프로젝트가 아동복 매출 올리기. 맞죠?"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 모르는 게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네.."
".. 손님이 한 명도 없네요"
백화점 2층 아동복 코너엔,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창고에서 박스를 꺼내 옮기는 직원들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어떤 것부터 조사해 볼까요? 생각해 보셨던 거 있으세요?"
"글쎄요.. 손님이 없어서.."
"그러네요, 매장 매니저 분들이랑 얘기라도 해 볼까요?"
"네 그래요"
근처 L 백화점으로 몰린다는 얘기, 좋은 상품이 없다는 얘기 등등.
매니저들의 한탄을 한 시간가량 듣고는 기가 다 빨려버렸다.
".. 이 일도 여사로 볼게 아닌갑네"
"... 네?"
"네?.. 아, 이 일도 보통일이 아닌가 봐요. 그런 뜻이에요"
"아.. 그런가 봐요"
".. 스타벅스 있네요, 잠깐 쉬시죠"
오전 내내 핸드폰이나 만지작 거리던 이지민의 태도가 내심 거슬렸는지.
살짝 날이 선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 1층 카페에 들어왔다.
"1시간 남았네요"
지민은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는 시계를 보며 말한다.
"그러게요, 벌써 이렇게 됐네요. 곧 본사로 복귀해야겠어요"
"... 그런데, 나무님은 쭉 대구에 사셨던 거예요?"
지민은 4시간 만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렇죠? 고향이 대구여서요"
"스무 살 이후로도 쭉 대구에 계셨어요?"
"아 네네, 스물넷부터는 임관해서 - 잠시 경기도에 살았죠"
"아~ 아예 대구 사람은 처음 봤네요"
"하하, 뭐.. 많지 않을까요? 저 같은 상경인 꽤 될 거예요"
아예 대구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의도는 모르지만 썩 좋게 들리지 않는다.
하품만 하던 지민은 생기가 도는 듯,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그러려나요,, 이제 갈까요?"
어느 순간부터는 묘한 미소를 띠던 지민이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시고는 가방을 챙긴다.
"오늘 현장 조사에 대해서, 한 분씩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퇴근 전, 인턴 교육을 담당하던 인사팀 직원이 교육장에 공지를 한다.
"발표는 제가 할게요"
어딘가 고집 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지민이 말한다.
워낙 소극적인 사람이라,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인터뷰했던 수첩 드릴까요?"
"괜찮아요, 녹음한 거 듣고 있었어요"
돌아오는 택시에서부터 이어폰을 끼고 있더니,
인터뷰를 녹음하고선 듣고 있어나보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는, 노트에 무언갈 적고 있다.
"김나무 님, 이지민 님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인사팀 직원이 우리를 호명했고, 지민은 노트를 들고
교육장 강단으로 걸어 나간다.
"안녕하세요, 1조 이지민입니다"
뒷 순서를 기다리는 마흔 명의 인턴들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박수를 친다.
긴장이 되겠지, 모든 것이 평가로 보일 테니.
"저희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금천구의 B 백화점 현장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오전엔 손님이 없어서 - 매장의 매니저님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저는 A ~ C 브랜드를, 김나무 님은 D ~ F 브랜드를 조사했고 - 이를 통해 도출한.."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지민의 발표를 지켜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매장을 돌아다닌 건 나인데,
강단에서 퍼지는 얘기는 - 두 사람의 합작 조사로 도출해 낸 멋들어진 가정이다.
"....입니다. 이상입니다"
짧은 박수 소리가 들리고, 지민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돌아와 내 옆에 앉는다.
".... 고생하셨어요"
당당한 걸음걸이와 이 태도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뻔뻔한 기에 눌린 것인지, 입만 벌리고 옆을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나머지 동기들이 발표를 시작했고, 저마다 본 것과 느낀 것을 발표한다.
다만, 귀에서 웅웅 맴돌 뿐 - 내용이 귀에 꽂히지 않는다.
머릿속엔 온통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아니야, 발표 잘 끝냈으면 된 건가? 아니야..'
아직 이지민의 발표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 한 내 머리만 복잡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발표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 내일 뵙겠습니다"
마지막 인턴의 발표가 끝나고, 인사팀 직원이 시계를 확인하며 교육장 문을 연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내일은 저희 술 한잔 할까요?"
1조의 조장을 맡은 이광해가 살살 웃으며 얘기한다.
현준과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술이 당기던 참이었다.
"... 네"
눈치를 살피던 이지민이 마지막으로 대답한다.
"그럼 내일 퇴근하고 강남에서 한 잔 하시죠! 내일 뵐게요 ~"
조원들의 반응을 살피던 이광해는 흡족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더니
먼저 교육장을 나선다.
사옥 문을 열고 나오니,
회색의 고층 빌딩이 빼곡-히 들어찬 강남 길거리와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가 담배를 태우는 직장인들이 보인다.
왕복 12차선 도로 위엔 버스와 승용차가 가득하고,
한쪽 버스 정류장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보기는 힘들고,
모두가 스마트폰의 액정을 보며 걷고 있다.
"하..."
뒷 목이 아파온다, 올려다본 하늘은 회색빛이다.
서울에 온 지 열흘째.
퇴근 후 '집'에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모텔 살이.
따뜻한 집밥 대신 햄버거나 라면으로 때우는 저녁 식사.
이곳이 서울이라서 힘든 건지, 그저 타지의 삶이 힘든 건지.
유독 고생스럽게 느껴지는 오늘 하루도 끝났다.
오늘 본 이지민의 태도와 행동을 곱씹으며 기분 나빠하기에는
당장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과정이 더 하드코어다. 잠시 잊자.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
서울에 오긴 왔는데, 아직은 고개가 갸우뚱하다.
가방을 앞으로 고쳐 메고, 지하철 입구에 어깨를 비집어 넣을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