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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드 Aug 31. 2023

매주 퍼포먼스 체크 당하다가 권고사직 당한 썰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 뒤 나가라고 등 떠밀린 MZ세대 이야기

생각 없이 쓴 '공무원 그만둔 얘기'가 뜻밖에도 조회수가 폭발하였다! 공무원과 퇴사 중 어떤 게 더 대중적인 주제라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필자의 익사이팅(?) 혹은 익스트림(!)한 퇴사 기록은 하나 더 있다. 


공무원을 그만둔 뒤 번역가 생활로 돌아가서 조용하고 일상적인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 회사에서 어느 정도 머물 계획까지 있었는데 코로나에 걸린 이후 회사의 대처, 그리고 연봉계약서를 보고 정말 그곳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그 회사 사람들은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거나 연차(유급휴가)를 쓰거나 두 가지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때 코로나에 처음 걸렸던 나는 심한 고열 및 다양한 증상으로 도저히 근무할 수가 없는 상태였고, 3일을 누워 있다가 겨우 재택근무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급휴가를 쓸 마음은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 준비를 하려면 남은 연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알 것이다. 출근한 뒤 나는 재택근무도 하지 못한 3일을 무급휴가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내가 내 월급 깎겠다는 선택은 편법도 뭣도 아니고 그냥 개인의 성향 차이일 뿐이다. 법적으로 안 되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근로자의 의지에 반해서 유급휴가 사용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근로기준법 위반 아닌가? 내가 월급보다는 유급휴가가 중요해서 차라리 월급을 삭감하라는데 왜 이런 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담당자는 회계 처리가 다 끝나서 굉장히 번거로워진다, 대표님의 지시 사항은 재택근무 혹은 연차 사용이다 등등 갖은 이유를 들어서 끝내 내 유급휴가를 삭감시켰다. 참고로 이 회사는 특허'법률'사무소였다. 


그렇게 회사가 내 안의 점수를 왕창 깎아먹고 얼마 되지 않아 연봉 재계약을 할 때가 되었다. 담당자는 조용히 나를 불러서 갱신된 연봉계약서를 내밀었다. 가장 위쪽에 나온 액수를 보고 '잘 쳐줬네?' 싶었으나 세부사항을 보고 나는 그야말로 '싸함'을 느꼈다. 연봉 금액에 퇴직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다들 아시겠지만, 연봉과 퇴직금은 별도인 게 상식이며 퇴직금을 뺀 진짜 연봉액을 시급으로 계산했을 때 최저임금보다 낮으면 이는 심각한 법률 위반 사항이다. 나는 대놓고 담당자에게 계약서를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애매하게 동의하면서도 이게 사내 형식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했다고 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다수가 불법에 순응한다고 나도 동조하란 말인가. 거기서 내 마음속 회사의 점수는 0점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근로계약서와 연봉계약서로 장난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혼신의 힘을 바쳐 이직 과정에 뛰어들었다. 






사실 이직 준비는 천천히 하고 있었다. 그 해 설날 언니가 외국계 회사에 도전하는 게 어떻겠냐고 계속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외국계 회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지내니 그런 것일 테지만, 사실 언니는 현재는 사라졌으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인물이기에 어느 회사에 들어가도 잘 대우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공무원 때도 그렇고, 나는 가족들의 말을 존중하는 편이라 이직 시장에서의 나를 시험해 볼 겸 링크드인을 가입하며 조금씩 외국계 회사 입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영어로 링크드인 프로필을 작성하고 구글에서 깔끔한 템플릿을 다운로드하여 영어 이력서를 만들었다. 커버 레터(자기소개서)는 회사가 요구할 경우 그때그때 쓰기로 했다. 어쨌든 영어로 밥벌이를 해왔으므로 내용을 채우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서류 합격은 그럭저럭 되는 편이었는데 시험과 영어 면접이 문제였다. 나는 해외 체류 경험이 전혀 없는 토종 한국인인지라 스피킹에 제일 약했다ㅠ_ㅠ. 직무 특성상 영어 시험 혹은 과제 작성과 영어 면접은 2번씩 치러질 때가 많았고, 풀타임 근무를 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씩 쳐내는 게 버거웠다. 면접을 한 번만 보면 좋을 텐데 두 번씩 봐서 그만큼 연차도 계속 쪼개서 내야 했다. 영문 기사와 콘텐츠 작성, 영어 프레젠테이션, 영어 테스트, 링크드인을 통해 제안이 들어올 경우 스크리닝 콜도 모두 영어로, 면접은 당연히 다 영어로... 정말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는 시간을 n개월 거쳤다(...) 하지만 꼭 최종 면접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지쳐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링크드인으로 홍콩에 있는 리크루터가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기존에 지원하고 있던 포지션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일이었다. 그와 스크리닝 콜을 1시간 가까이했는데 내가 꽤 마음에 든 눈치였고 1차 테스트 파일을 보내준다고 했다. 테스트 합격! 2차는 사무실에서 면접이 있었다. 홍콩인과 한국인이 동석한 (당연히) 영어 인터뷰였다. 다행히 합격하고 곧바로 2차 테스트에 돌입, 두 번째 테스트는 결과를 먼저 알려주지 않은 채 바로 2차 면접을 보았다. 그 회사의 서울 브랜치가 속해 있는 아시아퍼시픽 지역을 총괄하는 곳이 홍콩이었기 때문에 역시 홍콩분들과 화상 영어 면접. 한 마디로 5단계를 거친 셈이다. 정말 다행히도 합격했다! 


이전 직장 두 곳에서 레퍼런스 레터 2개를 서면으로 요구하는 굉장히 이상한 최종 요구 사항에 크게 당황하긴 했다. 보통은 회사 측에서 연락처를 받아 알아서 전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근로자에게 레퍼런스 레터를 얻어오라니, 여기가 무슨 뉴욕 본사인 줄 아는 건가. 이에 관해서 정말 할 말이 많긴 하지만 다행히 그것까지 해결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나는 직전 연봉액을 비교했을 때 꽤 높은 추가금을 얹었는데 그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나는 뜻밖에도 모든 대륙에 브랜치가 있는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 회사는 확실히 수평적이고 어떤 점에선 자유로운 문화를 갖고 있었다. 시니어 딱지를 단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리, 과장처럼 직책명은 없었으며 한국인도 원한다면 영어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외국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까지 그러는 건 좀 낯간지러울 것 같아 나는 캐서린 등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한국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곳은 정확하게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었고, 점심시간도 딱히 고정되어 있지 않아 원할 때 1시간 휴식을 취하며 끼니를 챙기면 되었다. 


반면 외국계 회사임에도 한국식 꼼수인 포괄임금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극대화된 미국식 성과주의와 마이크로매니징이 거의 괴담 수준이었다. 내 주변인들 모두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사항들 중 먼저 마이크로매니징과 관련된 부분부터 얘기해 보겠다. 이곳의 수습기간은 6개월이었는데, 한국의 근로기준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사항이기에 강제되진 않았지만 이 수습기간 동안에는 가급적 유급휴가를 쓰지 않을 것을 권했다. 또 이 기간에는 트레이너가 오전에 오늘 어떤 업무를 할 예정이냐, 오후에는 일은 잘 되어가시냐를 체크했다. 신입 입사자를 세심하게 신경 써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개인에 따라서는 상당한 압박감과 간섭으로 느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퇴근 전 브랜치의 매니저와 트레이너에게 하루에 소화한 일의 양을 비롯하여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메일에 써서 보내야 했다. 매주 내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체크하는 대면 미팅도 있었다. 내가 쳐낸 일의 양은 사원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스프레드시트에 공유되어서 트레이너와 매니저가 언제든 체크할 수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마이크로매니징에서 이미 미국식의 거대하고 숨 막히는 성과주의가 녹아있다는 게 보이겠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내 포지션은 6개월간 7개 카테고리를 통과해야 수습을 마무리하고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 회사에서밖에 없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신입 입사자는 그야말로 모든 걸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야 했다. 10건 평균 90점 이상이 되어야 카테고리 하나를 통과할 수 있으며 점수 체계는 100점/80점/0점 세 가지뿐. 0점을 맞는 실수를 하나라도 저지를 시 앞에서 얼마나 잘했든 그건 무효가 된다. 


나는 네 번째 카테고리를 통과한 뒤 다섯 번째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매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었다. 수백 장 짜리 문서에서 0점짜리 실수 하나만 생겨도 원점. 지금 돌이켜보건대 내가 통과해야 하는 카테고리는 오직 모니터로만 행해야 하는 작업인 반면 그동안 나는 아날로그 출력물을 통해 작업물 퀄리티를 확보하고 있었고 그렇게 배웠던 게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다. 3~4개월간 겨우 정립해 놓은 프로세스를 카테고리 하나 통과를 위해서 바꾸는 게 너무 힘들었고, 인체와 집중도가 아직은 아날로그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은가. 한 달에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 일정 속에서 나는 한 달 반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100점이나 80점이 좀 쌓이면 0점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렸고,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도 진전이 없자 나도 사람인지라 지치고 말았다. 위염과 장염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뭔가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성과 확인 미팅을 할 때마다 속상해서 울었다. 


그러다 브랜치 매니저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한 마디로 권고사직을 제안받았다. 내가 그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나 배차 간격이 40분인 대중교통으로 왕복 100km 출퇴근을 소화하면서,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점심 휴식 시간도 곧잘 채우지 않는 모습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 나는 한글과 영문을 병기한 메일에서 이 사직은 내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상실 코드를 보장받은 뒤 그 회사를 떠났다. 






그렇게 회사에 의해 사직을 당한 것이라 나는 처음으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공무원을 그만두었을 때는 공무원은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아니라 아예 자격 자체가 없었다..) 그 사이에 패키지 여행이지만 이탈리아도 가보고 국내여행도 다녀오고, 결과적으로는 정규직으로 다시 취직하여 워라밸을 잘 챙기고 있다. 


외국계 회사에 도전하게 된 것도 사실 나를 고려한 근본적인 이유는 없었다. 외국계 회사가 보통 워라밸이 좋고 대우를 잘해준다고 하니까, 이 기회에 연봉 좀 올리려고, 기회가 된다면 외국에서 일할 기회도 있겠지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외적인 요소들은 과연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으며 나를 쉽게 실망에 빠지게 했다.


공무원, 외국계 회사 취업, 대다수 사람들이 바라는 일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언제나 나 자신과의 공명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개인이 존재하는 숫자만큼 다양한 양상의 행복과 만족이 존재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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