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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yiun Oct 25. 2024

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 下

라플라스의 악마 # 6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꿈이 다시 생각났다. 머리를 흔들었지만 떨쳐지지 않았다. 로건과 조이, 레오. 앉은 순서도 하필 꿈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저들은 뭘 저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는 걸까. 평소 말이 없는 로건도 그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았다. 막대처럼 깡마른 체구에 시커먼 유니폼을 입은 조사관이 집중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집요하게 같은 걸 묻고 있었다.


  “당신은 옥토끼에 취업한 뒤에 실수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 전 직장에서도 그랬지.” 


  그래. 나는 그렇게 살았었다. 뉴트럴이니까. 


  “심지어 상사에게 스토킹을 당하면서도. 브라보, 그 정신력 정말 놀라워.” 


  하필 그는 '뉴트럴 킬러'였다.  


  “결국 그것 때문에 직장을 옮겼지. 그런데 그런 당신이, 이번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중대한 실수를 했다고? 갑자기?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빨리 자백해. 배후가 누구야!”


  내가 한 행동은 깜빡 잊고 토큰을 저장 안 한 게 전부였는데. 조사관은 실수일 리가 없다고 했다. 어떻게 우주정을 폭발시켰는지, 누가 시킨 일인지 반복해서 물었다. 황당했다. 아무래도 나를 폭파범으로 만들어 위원회에 제물로 바칠 생각인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할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전날 꿈 얘기를 조사관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었다. 견뎌보려고 꼭 쥐었던 손에 쥐가 났다. 온몸의 힘줄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로건과 레오가 응원의 눈빛이라도 보내준다면 좋을 텐데. 밖에 앉은 두 사람은 나를 보지 않았다. 그 망할 로봇과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문득, 죽음을 떠올렸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존재인 내가, 세상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찾기 어렵다면, 의미 같은 게 없는 거라면, 나는 지금 당장 사라져도 되는 게 아닐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전자레인지에 넣은 얼음조각처럼 앉아있는 자리에서 순식간에 기화되어버리고 싶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밖에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조사관이 나를 찔러대던 고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나는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테이블에 엎어졌다. 


  숙소까지 나를 업고 데려간 건 로건이 아니었다. 로건이 아니라 조이였다. 그래, 조이는 체구가 작지만 로봇이니까 힘이 좋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업혀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죽거리고 있었다. 


  내 몸은 김을 내며 펄펄 끓고 있었다. 분노였다. 내 안에 뭉쳐진 분노가 독이 되어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불꽃이 너무 뜨거워서 얼굴엔 쌀알 같은 불그죽죽한 열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의식 한 가닥은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감정의 폭풍에 압도되고 있는 내가 낯설다는 생각. 나는 어쩌면 내가 그동안 알고 지냈던 나와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


  조이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푸른 작업복을 벗겼다. 작업복 아래, 낡은 속옷까지 벗겼다. 타인의 앞에서 완전한 나체가 되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조이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수치심이 솟아나지 않았다. 의외였다. 감정을 발동할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나체가 된 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간유리를 통해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뿌연 시선으로 스스로 옷을 벗는 조이를 보았다. 선이 곱고 팔다리가 길었다. 


  맨몸이 된 조이가 나를 안았다. 불덩이 같은 나의 가슴과 배, 다리를 자기 몸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우리는 둘 다 돌출된 성기가 없는 존재였다. 조이는 그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 체온을 낮췄다. 조이의 팔과 손이 내 등을 감쌌다. 


  내 안에 끌어 오르던 것들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떨리며 요동치던 몸도 잔잔해졌다. 내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이는 나를 놓지 않았다. 그 어느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의 안에서 무언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바닥을 알지 못하는 해구처럼 깊은 꿈에 빠져들었다. 그때 조이가 내 귀에 속삭였다.


  “아주 옛날에 라플라스라는 사람이 있었어. 마리처럼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 만약에 우주의 모든 변수를 속속들이 아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겐 미래가 보일 거라고 그랬어. 후대 사람들은 라플라스가 말한 그런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악마일 거라고 했지.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마리도 로건도 레오도 사랑해. 나는 그런 존재니까.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니까. 그런데 사랑할수록, 알아갈수록, 자꾸 힘들어져. 내 존재가 점점 두려워져. 마리, 나는 어쩌면 악마일지 몰라.”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디쯤에서 눈물을 흘렸다. 

  조이가 라플라스를 다시 꺼내기 전까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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