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뜨거운 커피를 차갑게 먹는 이유

by Trey

오늘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바쁜 날이었으며, 이렇게라도 적어 내려 가면 마음의 답답함이 해소될까 싶어 글을 쓴다.


오늘은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해야 했다. 1교시에 저학년 운동회 연습이 있다고 한다. 내가 저학년 담임이기 때문에 일찍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운동회 연습을 진행하기 위한 방송 장비를 운동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해야 했기에 일찍 출근을 했다. 천천히 평소처럼 출근해서 준비를 해도 무난히 처리할 수 있었을 테지만 돌발상황이 생기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나는 평소보다 더 뜨겁게 달라고 요청했다. 펄펄 끓는 듯한 커피를 들고 교실에 올라가 가방을 두고 방송 준비를 시작했다. 요즘 수많은 스트레스로 기억력이 나빠진 건지 자꾸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출근 30분도 안되어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3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을 굉장히 반가워한다. 운동장과 방송실 등 여러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나를 발견하고는 뛰어온다. 잠시 후에 9시가 되면 다 같이 운동장에 나와서 운동회 연습을 할 것이라 이야기하고 교실에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이야기했다. 준비를 마치고 나는 교실로 올라가서 아이들에게 내려가자고 말했다.


내려가는 길에 같은 학년 선생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려가다가 계단 청소가 필요하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차 싶었다. 우리가 내려가는 그쪽 계단을 2학기에는 우리 반이 담당하기로 했었다. 몇 차례 아이들과 청소를 하기는 했지만 2~3주간 너무 정신이 없고 힘든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상태로 운동장에 가서 정해진 우리 반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밖에 나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즐거워하고 들떠한다. 더군다나 1~3학년 아이들이 모여있다 보니 선생님들의 말은 거의 전달이 되지를 않는다. 아이들을 모두 앉도록 하고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출근 한 시간 만에 집에 가고 싶어 졌다. 근데 자꾸 누가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조회대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이크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다급하게 방송실로 뛰어가 보니 방송장비가 꺼져있다.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원을 켠 채로 설정을 맞추어 두었는데 아마 방송부 아이가 아침에 켜진 것을 보고 끈 모양이다.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며 다시 켜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줄 서기 연습을 했다. 운동회 연습을 안 하는 것이 추세이고, 우리 학교도 사실 운동회를 이벤트 업체에 위탁하여 진행을 하는 터라 연습이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저학년 아이들이라 줄을 서거나, 선서를 하거나, 교가를 부르는 연습은 필요했다. 줄 서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이미 지쳐있었는데 더 지쳐갔다. 아무튼 줄을 서서 선서를 하고 준비운동 연습을 하고는 계주 연습을 한다고 했다. 계주 연습을 하려면 출발시키는 사람, 도착한 아이를 순서에 맞추어 앉도록 안내하는 사람, 다음 주자를 대기시키는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다. 어느새 운동장을 보니 나를 포함한 몇몇 선생님들 뿐이었다. 나도 우리 학급이 있고, 우리 아이들이 자리를 이동하거나 장난을 치지 않도록 지켜보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계주 연습을 도와주게 되었다. 거기 계신 경력 많으신 옆 반 선생님들께서 잘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교실로 들어오니 바로 2~3교시 수업 종이 쳤다. 미술이었고, 먹물을 사용해야 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준비물로 챙겨 오라고 한 신문지를 책상에 펼쳐두고 있었다. 처음 먹물을 사용해보는 아이들이라 먹물부터, 붓, 화선지, 벼루 등 설명하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살펴본 뒤에 두께를 조절하여 선 그리기, 그림 따라 그리기, 자유롭게 그림 그리기를 했다. 중간 쉬는 시간도 없이 했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 학교는 저학년이 3교시를 마치고 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1~3학년 중 최고 학년이라 3학년 아이들이 ‘생활 도우미’라는 활동을 해야 한다. 이번 주는 우리 반 학생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복도에서 안전지도나 생활안내를 해야 했다. 생활도우미를 하는 반은 보통 다른 반보다 밥을 일찍 먹어야 한다. 다른 반보다 밥을 먹으러 일찍 가야 하는데 먹물을 정리하다 보니 이거 상황이 너무 어려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점심을 먹었다. 식탁을 닦아주고, 자리를 알려주고, 급식 지도를 했다. 교실에 가니 아까 정리하다 만 서예 붓들이 모여있었다. 우리 반은 교실 안에 화장실이 있다. 미술 할 때는 편리하지만 먹물을 사용할 때는 어려움이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먹물 사용한 붓을 정해진 통에만 넣어두라고 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흐르는 물에 붓을 하나씩 씻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한 일곱 개쯤 닦았을까 교실 전화가 울리고 교사연구실에 회의가 있으니 얼른 오라고 했다.


회의를 가보니 다음 주 화요일에 있을 운동회와 수요일에 있을 민속촌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것이었다. 회의를 하다 보니 수업 시작 종이 쳤다.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 수업을 했다. 마지막 교시는 다음 주의 행사에 대해 설명해주고 질문을 받기로 했다. 질문이 많아서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교실 프린터가 며칠 전에 망가져서 연구실의 프린터에 컴퓨터를 연결해 두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주간 학습 안내를 인쇄해 놓았는데 가보니 용지 부족으로 7장만 인쇄가 되어 있었다. 부랴부랴 복사를 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주말 잘 보내세요”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을 집으로 보냈다.


빗자루를 들고 오전에 다른 선생님에게서 이야기가 나온 계단으로 향했다.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계단을 청소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후딱 해버리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하다 보니 손목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먼지가 정말 한 가득 모여서 치워지는 것을 보니 뿌듯하기도 했다. 그때의 시간이 3시였다. 얼른 교실로 올라가서 나머지 붓을 씻기 시작했다. 다 씻고 정리를 하니 3시 30분이었다. 나는 오늘 4시에 학부모 방문 상담이 예정되어 있다.


교실 정리를 조금 하고 4시가 되어 학부모 상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4시 40분에 있는 상담까지 마무리했다. 얼른 퇴근하고 좀 쉬어야겠다 싶어서 책상을 정리하는데 아침에 산 커피가 있었다. 오늘 아침에 방송 장비를 준비해야 하니까 일부러 더 뜨겁게 시킨 건데, 방송 준비 후에 들어와서 따뜻하게 먹어야지 하면서 시킨 커피인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 건지 퇴근길에도 커피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주 차가워진 커피였다.


슬프거나 짜증 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어이가 없었다. 뭘 한다고 이렇게 커피 한 모금할 새도 없이 바쁘게 지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상담도 끝나고 일주일도 끝나고 이번 달도 끝났다. 하루를 보내며 굉장히 답답했지만, 결국은 어떻게든 끝이 났기에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주, 새로운 달, 새로운 시기를 마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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