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오늘 아침은 어젯밤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어젯밤 기분이 좋았던 까닭은 라온이가 “아빠, 동시 읽기 너무 재미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라온이가 등굣길에 “아빠, 오늘도 동시 읽자. 오늘은 아빠가 먼저 읽어”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엔 보통 집과 달리 책이 많다. 이따금 집안 책장을 한 번씩 휘둘러보면 그간 모은 좋은 책들로 가슴이 뿌듯해지곤 한다. 어느 날 인연 닿는 대로 느낌 가는 대로 손에 집히는 책을 뽑아 읽는 날을 꿈꾸었던 적이 있다. 서른 전의 일이었다.
그 일이 15년이 흘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어 작은 보람을 느낀다. 이제 나의 꿈은 이 책들을 내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어제는 저녁시간에 식탁 뒤편에 놓인 아이들 책을 훑다가 동시집 1권과 신화책 1권을 집어냈다. 동시집은 작은 아이 바론이한테 읽어줄까 싶어 뽑았고, 신화책은 매일 3권을 읽고 독서노트를 쓰는 걸 숙제로 받은 라온이한테 읽어줄까 하고 뽑았다.
신화책은 아이들 저녁 먹는 동안 짬을내 재미있게 읽었다.
폴리네시아 신화의 주인공 마우이를 다룬 <사람을 사랑한 영웅 마우이>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태생부터 남달랐던 마우이는 마음씨도 착하다.
할머니한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을 도맡아 한다. 할머니는 마음씨 착한 마우이에게 신비한 힘을 가진 턱뼈를 선물로 준다. 마우이는 그 턱뼈를 가지고 주민들의 걱정을 하나둘 해결해 준다.
해가 너무 빨리 져 불편하다는 주민들 얘기를 듣고는 해가 천천히 지도록 턱뼈로 태양을 붙잡아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불이 없어 사람들이 맹수의 공격을 받고, 날고기를 잘못 먹어 병이 들기 일쑤라는 걸 알고 불의 신을 찾아가 심부름도 하고 애교를 떨어 불도 구해다 준다.
그다음 마우이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목숨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의 여신과 맞서 싸운다. 이 싸움으로 마우이는 최후를 맞는다.
주민들은 이 소식에 깊은 슬픔에 빠진다. 사람들은 비록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했지만, 영웅 마우이를 영원히 기억하기로 한다. 마우이는 시간이 갈수록 영웅보다 신으로 인식된다.
<사람을 사랑한 영웅 마우이>에서 흥미로운 점은 죽음의 여신이 낮에는 자고 밤에만 활동해서 사람들이 밤에만 죽는다는 설정이다. 때문에 마우이는 죽음의 여신을 해치우면 사람들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여신은 마우이와 일전 후 밤낮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낮에도 죽고 밤에도 죽는 이유다. 아주 그럴싸하지 않은가.
<말놀이 동시>는 몇 편 읽다보니 너무 재미도 있고 놀라워서 바론이에게 읽어주고 싶었다.
저녁을 다 먹은 만 3세 바론이에게 동시를 읽어줄까 물었더니 “우~ 우~” 싫다고 했다. 만 6세 라온이에게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라온이는 아빠와 함께 동시 40편을 단번에 읽었다. 아빠가 마지막 몇 편을 두고 그만 읽자고 했더니 다 읽고 싶다고 했다.
동시 40편을 라온이 한 단락 아빠 한 단락 이렇게 읽었다. 라온이에게는 아기 때부터 의태어, 의성어 동시를 자주 읽어줬다. 바론이는 여건이 그리 되지 못했다. 바론이한테 그리 못해 준 게 생각나 바론이에게 읽어주려 했지만 바론이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라온이가 관심을 보였다.
동시는 대개 감각적이다. 감각적이라는 것은 말맛이 싱싱한 활어처럼 통통 튄다는 뜻이다. <말놀이 동시>는 모두 동물을 주제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겠지 하면 오산이다. 어른들이 읽어도 손색이 없다.
▲말- 달리고 싶어
말이 달리고 싶어
발굽을 따악따악!
들을 달리고 싶어
콧김을 푸우푸우!
어서 달리고 싶어
꼬리를 쉬익쉬익!
힘껏 달리고 싶어
이빨을 히잉히잉!
▲소- 머얼뚱
왜 그러니?
-머얼뚱.
할 말 있니?
-머얼뚱.
나를 보는
누렁소.
커단 눈만
-머얼뚱.
▲당나귀- 와삭와삭
달랑달랑 당나귀는
홍당무가 좋대요.
와삭와삭 소리나는
홍당무가 좋대요.
푸우푸우 코를 불며
뒷발질을 하다가도
홍당무만 던져 주면
와삭와삭 먹어 대죠.
▲병아리- 콕콕콕
병아리가
콕콕콕
모이를 쫍니다.
병아리는
콕콕콕
모래도 쫍니다.
라온이는 리듬을 타며 읽다가 의성어, 의태어가 나올 때마다 목젖을 보이며 깔깔 넘어갔다.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아무렴 애든 어른이든 뭘 좀 알아야 재미를 느끼지, 저 좋아하는 일하며 살아야지, 라온이 웃는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어느 어른이 이런 통통 튀는 동시를 지었을까. 동시작가 문삼석이다.
오늘은 아빠가 1연을, 라온이가 2연을 따라 읽기로 했다. 라온이한테 어느 동시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볼 참이다. 라온이가 동시 읽기를 언제 쉴까, 그것도 궁금하다.
▲토끼-언제 쉬는 거니?
아침에도
오물오물…….
저녁에도
오물오물…….
토끼야,
네 입은
언제
쉬는 거니?
아빠는 아래 이 동시가 좋았다.
▲거북-왜 느리냐고?
거북이가
왜 느리냐고?
등을
봐!
길 잃은 물고기들
길 찾으라고
지도를 그려
지고 다니잖아?
동시집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흥을 더한다. 책은 아이 책, 어른 책이 따로 없다. 있다면 그런 편견이 있을 뿐이다. 문득 “무더운 여름엔 화장실에 앉아 아이들 도감을 본다”는 일본의 한 70대 독서광 말이 떠오른다. 거북이 등이 지도라니? 라온이는 말도 안 된다며 깔깔댄다. 아빠는 자못 진지하다. 어라? 길 잃은 물고기들 길 찾으라고 지고 다는 게 거북 등? 유레카! 염천(炎天)의 밤, 오슬오슬한 물줄기가 등골을 타고 내린다. 마우이의 턱뼈 같은 신비한 힘이 빳빳하다. 동시집엔.
얼마 전 라온이 피아노 과외선생이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 라온이는 섬세하고 차분해서 공부를 잘할 것 같아요.” 문득 라온이 재간이 보통은 넘겠구나 싶다. 라온이와 더 열심히 놀아야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이 삼간(三間)에 잘 놀아야 건강하게 자라는 게 인간 기본 속성이다. 놀이가 곧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