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펀딩 3편] 셜록 박상규 기자
박상규 기자에게 나는 ‘질긴 놈’이다. 나는 그를 퇴사시켰다.
박 기자와의 첫 만남은 2006년. 나는 언론사 지망생, 박 기자는 내가 가고 싶은 언론사의 공채 기자였다. 그 언론사에서 여름 인턴 기자 활동을 하게 됐다. 박 기자와 처음으로 현장에 나갔을 때다.
“너 노충국 사건 알아?”
“네 알죠.”
“그거 내가 특종 했어.”
그는 초면에 대뜸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사건은, 고 노충국 씨가 군 복무 중 위암이 생겼으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망한 사건이다. 전역 보름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보도 이후 군 의료 체계의 총체적인 문제점이 불거졌고, 국방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2006년 세상을 뒤흔든 특종 중 하나였다.
그런 특종 보도를 본인이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얘기했다. 내심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와우~ 대단하시네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선배님!”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난 감언이설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깡다구’ 있어 보였다. 박 기자는 당시 2년 차 막내 기자였지만, 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항상 자신했다. ‘나의 기자 롤모델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언론사에서 인턴기자에게 정기자 전환 기회를 줬다. 나는 (그때만 해도) 롤모델로 삼았던 박상규 기자에게 연락했다. 박 기자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박 기자의 취재 동선을 파악했고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만났다. “너 여기 왜 왔어”하며 놀랐지만 채용 시험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줬다.
정기자 채용 된 후 박 기자에게 이후 물었다.
“그때 왜 그렇게 나를 피했어요?”
“미리 알려주면 좀 그렇잖아. 근데 나를 뒷조사해서 찾아온 걸 보고, 너는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질긴 놈이 취재도 잘하거든. 나처럼..”
그렇게 ‘질긴 놈’끼리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8년이 지났다. 그사이 나는 언론사를 떠나 포털 회사 직원이 됐다. 포털에서 서비스 기획자가 된 나의 롤모델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스토리펀딩의 전신인 ‘뉴스펀딩’을 기획 중이었다.
독자의 돈을 모아 취재하는 참여형 저널리즘, 크라우드 펀딩 저널리즘 플랫폼을 만들고 있었다. 이상적이며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뉴스 콘텐츠 유료화는 천하의 뉴욕타임스도 어렵다고 선언한 시기였다. ‘독자들은 절대 뉴스에 돈을 내지 않는다’는 정설이 되고 있었다. 많은 언론사에 돌아다니며 함께 하자고 권유할 때마다 대부분 반신반의했다. 사실상 문전박대 당했다.
나의 친정이었던 오마이뉴스에 가서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배가 고파서 박상규 기자를 불러내 밥 사달라고 했다. 2014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박상규 기자는 퇴사를 고민하는 10년 차 기자가 됐다. 서울 4대문 밖의 생활을 궁금해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쓰고 싶은 기사를 쓰고 싶어 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쓰고 싶은 기사가 있는데, 주말마다 취재도 했어. 이게 이야기가 될 거 같은데. 회사에 매어 있어서 제대로 취재할 수가 없네. 회사 나가면 당장 수입도 걱정이 되고.”
“선배 그거 뉴스펀딩에 써보시는 거 어때요? 제가 어떻게든 돈은 모아 드릴게요”
“그게 돈이 될까?”
“네, 됩니다. 퇴사하세요.”
주말마다, 휴가 내면서 취재했던 뉴스펀딩의 첫 프로젝트는 '그녀는 왜 칼을 들었나' 프로젝트 (친부 살해 혐의 무기수 김신혜 씨에 대한 내용이며, 이 사건은 2017년 2월 재심 결정이 나서 대법원으로 넘겨졌다.)는 2100만 원을 펀딩 받으며 돈 벌 수 있는 프리랜서 기자의 가능성을 봤다. 3개월 취재해서 수수료 제하고 약 2000만 원, 월 700만 원 정도 번 셈이니 기자 시절 월급보다 많았다. (물론 그 돈은 취재원들에게 대부분 나눠주고 그가 손에 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박상규 기자는 2014년 12월 31일 추운 겨울날 오마이뉴스를 퇴사했다.
사실 퇴사를 종용할 때,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한 사람 인생 망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많은 사회적 안전망도 함께 사라진다. 다달이 나오는 월급과 4대 보험,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지만 없어지면 서운한 사내 복지, 그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누가 이런 제안을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섣불리 결정을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물론이다. 아직은 회사의 울타리가 편하다. 내가 할 수 없는 걸 남에게 제안하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박상규 기자를 우리나라 대표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우뚝 서게 하고 싶었다.
2년 6개월간 12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가 모은 펀딩액은 10억. 스토리펀딩은 총 100억을 모았고, 그중 10% 박상규 기자가 혼자 모았다. 스토리펀딩의 최고 스타이자 롤모델이다. 재심 3부작 시리즈는 모두 재심 결정을 이끌어냈다. 두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공익 변호사 박준영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이도 바로 박상규 기자다. 이 프로젝트는 5억 7천만원을 모아 스토리펀딩 사상 최고 금액을 기록했다. 박 변호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업계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박상규 기자가 스토리를 입혔고, 이 스토리를 읽은 많은 이들이 감동하고 동참했다.
로저 셰퍼트라는 뉴질랜드 사진작가를 발굴했다. 북한을 직접 다녀온 로저 셰퍼트는 북한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알렸다.
2016년 12월, 퇴사한 지 2년 만에 ‘피플 펀딩’이라는 정기 후원 플랫폼에 박상규 이름 세 글자만 걸고 프로젝트를 띄웠다. 그동안은 그가 취재한 콘텐츠로 펀딩을 받았다. 피플 펀딩은 ‘박상규’라는 이름 세 글자만 걸고 후원자들에게 취재비를 펀딩 받는다.
2017년 9월 현재 342명의 후원자에게 월 423만 원의 후원금을 다달이 받는다.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낫다. 6개월 동안 어떠한 콘텐츠도 내놓지 않았다. 그래도 후원자들은 그의 이름만 보고, 그를 믿고, 돈을 낸다. ‘박상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다들 걱정한다. 콘텐츠로 돈 버는 게 지속 가능할지, 사회 안전망에 벗어나서 생계유지가 가능할지, 하지만 박 기자는 “정성을 다하면 길은 열린다. 누군가 주입한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라고 당당하다. '콘텐츠쟁이'면 이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 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백수 기자가 아니다. 미디어 스타트업의 어엿한 사장이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벌써 4명의 멤버를 영입했다. 종편 출신 기자, 일간지 출신 기자, 언론 준비생까지 면면도 화려하다. 월급도 진보 언론보다는 더 많이 준다. 방송사 기자만큼 주는 게 목표다. “돈 하나도 못 벌어도 1년은 월급 줄 수 있다”고 한다. 멤버를 더 늘릴 생각이다. 항상 “10명은 뽑아야지”라고 자신한다.
박상규 기자, 아니 박상규 사장은 ‘콘텐츠만 신경 써라’ ‘돈 벌어 오라는 소리 안 하겠다’ ‘당신이 어디에서 뭘 하든, 신경 안 쓴다’ ‘클릭 수만 노리는 의미 없는 기사 쓰지 마라’ ‘괜한 보고 하지 말라’고 셜록 기자들에게 당부한다. 진실을 보도하고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저널리즘을 실현하고 있다.
박상규 기자는 스토리펀딩 저널리스트 창작자의 롤모델이다. 제2의 제3의 박상규가 필요하다. 뉴스 콘텐츠로 돈 벌 수 있다는 걸 그가 몸소 보여줬다. 셜록 같은 매체가 10개만 생겨도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은 변한다. 100개가 생기면 전 세계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
그의 ‘깡다구’가 더 필요한 이유다.
나는 질기게 그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 스토리펀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 가진 창작자를 만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전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