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즈 국경에서의 실랑이

by tripall

출국할 때와는 달리 입국할 때마다 약간의 긴장이 있다. 보통 뭘 물어볼까 하는 언어적 두려움이 있을 텐데 그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입국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주는 담당 공무원의 권한은 여러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그 나라를 찾아온 방문객에게는 절대적이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와 무비자협정이 체결되어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사정이 열악해서 중남미의 나라들을 여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그 나라 대사관에 찾아가 준비한 서류와 돈을 내고 비자를 신청한 후 여권을 맡긴 채 한 주 또는 더 기다려야 했다. 일 년간의 여행을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준비하느라 여러 나라의 비자는 고사하고 한 국가 것을 받기도 빠듯했다. 비자발급이 까다롭다는 두 나라 것만이라도 받으려고 과테말라와 에콰도르 중 먼저 에콰도르 비자를 신청했는데, 방문날짜 기입에 착오가 있어서 다시 발행하느라 또 기다려야 했고 결국 한 나라 비자만 받고 여행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멕시코 티후아나로 들어갈 때는 짐검사도 없고 입국신고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게 이상해 그냥 나가도 되는 건지 다니면서 확인까지 했다. 국경을 오가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한국인은 입국신고를 해야 했는데 입국세로 20달러를 내고 이어진 건물을 나오니 국경을 넘은 것이었다. 아주 간단했다.

멕시코 여행 후 과테말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과테말라 비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면서 비자발급 정보를 확인했고 국경에서 발급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을 텐데 모든 국경이 그런 것은 아니란 사실을 경험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멕시코 여행이 유카탄반도 쪽에서 끝나 거기서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 다른 국경으로 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체투말이라는 멕시코 국경의 한 여행사에서 과테말라로 가는 비싼 버스표를 샀다. 벨리즈를 지나간다고 해서 그 나라에도 비자비를 내야 하는지 여행사에 물었더니 다른 곳에 전화문의까지 하곤 비자비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2003년 1월 29일 과테말라로 가는 미니버스를 탔다. 과테말라 입국신고서도 작성했다. 멕시코를 출국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벨리즈에서였다.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 짐을 들고 버스에서 내려서 입국절차를 밟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입국이 되는 것 같은데 나에게 10달러를 내라고 했다. 나는 이 나라를 통과할 뿐이라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하자 서류를 작성하게 하고 사무실로 데려가 25달러를 내라고 한다. 황당했다. 서류를 작성한 이유는 뭔지 궁금했다. 그 직원은 내 말에 화를 내며 돌아가라고 했다. 거기서 돌아가게 되면 비싸게 지불한 버스비도 날리고 멕시코에 입국세를 또 내야 하겠고 다른 국경으로 가려면 시간도 한참 걸릴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로 싫었지만 과테말라로 들어가려면 그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멕시코로 돌아가는 일이 생기리라는 걸 내다보는 초능력이 있었더라면 그 공무원 앞에서 보란 듯이 돌아섰을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거기만 지나면 과테말라로 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벨리즈 국경에서 실랑이 끝에 패배한 기분으로 우울하게 나오고 보니 내가 탔던 버스는 떠나고 없었다. 한 시간 넘게 다음 버스를 기다렸지만 이미 그 버스도 지나간 것인지 오질 않았다. 이 버스표를 끊기 전까지 벨리즈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고 방문하거나 거쳐 갈 생각도 없었다. 출입국직원과의 논쟁으로 정 떨어진 이 나라에서는 한 푼도 더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하루를 묵기까지 해야 했다.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나와 코로살(Corozal)의 한 숙소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국경으로 다시 가서 같은 티켓을 사용할 수 있는 그 회사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벨리즈를 출국하는데 15달러를 내야 했다. 한국사람은 40달러. 그 나라를 지나가기만 해도 65달러씩이나 지불하는 그 불합리한 상황을 한국여권을 가진 사람은 피해 갈 수 없었던 옛날얘기다. 내 경우는 입국할 때 실랑이로 15달러를 더 낸 건지 원래 25달러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른 국경으로 해서 과테말라로 바로 가면 이런 헛돈을 쓰는 일은 없었을 텐데.

돈만 내면 출국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과테말라 입국에 또 제동이 걸렸다. 비자가 없으면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국경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벨리즈시티까지 가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원치 않는 나라에 또 들어가야 했다. 과테말라로 몰래 들여보내주겠다는 환전상이 있었는데 정말로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 벨리즈 입국에 또 돈을 내려니 했는데 출국 도장을 취소시켜 줬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출국할 때 낸 돈을 돌려달란 말은 못 했다.

다음 날 벨리즈시티에 있는 과테말라 대사관을 찾아갔다. 비자를 받으려면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두 나라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게 이유인 것 같았다. 이 나라에서 두 달은 고사하고 하루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로 멕시코를 향해 떠났다. 벨리즈를 나오는데 또 출국세를 냈을까? 그랬다. 바로 그 전날 지불했는데 40달러를 또 내야 했다.

2박 3일간 본 벨리즈는 멕시코와 사뭇 달랐다. 스페인어가 쓰이기는 하지만 영어가 공용어였다. 흑인이 많았는데 공무원 대부분도 흑인이었다. 멕시코사람처럼 생긴 메스티소들도 물론 많이 보였는데 그들이 영어로 말하는 게 두 달간 멕시코를 여행한 후여서 그런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주변 국가는 제각기 다른 화폐를 사용했는데 벨리즈는 화폐단위로 달러(BZD)를 사용했다. 대만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특이하고 간판에 한자로 된 글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국경 공무원에게 뿌린 돈도 그렇지만 물가가 비싸서 짧은 체류 동안 쓴 비용이 많았다. 이래저래 정말로 싫은 나라였다.

나중에 귀국해서 알게 된 건 벨리즈가 스쿠버다이버의 천국이라는 거였다. ‘카리브해의 보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와 산호가 있다는데 운명이 데리고 간 그곳을 벗어나기만 급급해서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 나라를 다시 갈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바닷속 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쉽기는 하다. 영토가 작은 나라여서 둘러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벨리즈 입국 때 겪은 첫날의 경험은 벨리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단단히 심어놓았고 닫혀 있는 마음에는 그 나라를 여행하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그 나라가 좋진 않다.

멕시코 국경도시 체투말로 다시 갔다. 3일 전 과테말라로 가는 버스를 탔던 곳이다. 이번 멕시코로 들어오는 데는 입국세를 받지 않았다. 국경마다 다른 건지 종잡지 못하겠는데 어쨌든 20달러를 번 기분이었다. 도착한 날이 금요일 오후라 과테말라 영사관이 근무하는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월요일 오전 내내 영사관을 찾아 헤맸는데 못 찾고, 멕시코시티 과테말라 대사관과 통화해서 결국 알게 된 건 1년 전에 체투말 영사관은 폐지됐다는 사실이었다. 운이 얼마나 없는지 다른 국경도시에서는 모두 그대로 업무를 하고 있는데 여기만 없어진 거다.

일이 이렇게 계속 꼬이니 과테말라를 가지 말라는 건가? 칸쿤에서 비행기로 쿠바로 들어가 버릴까? 쿠바도 가보고 싶긴 한데 애초에 계획은 남미로 가는 거였고 과테말라는 가장 가고 싶은 나라이기도했다. 과테말라에서 홈스테이 하면서 스페인어 연수를 받으며 현지문화체험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었다. 과테말라가 물가가 싸서 그런지 이 프로그램이 인기가 좋았다. 과테말라 비자를 받기로 결정했다.

열두 시간 걸려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했고 버스를 갈아타서 한 시간 반을 더 가 코미탄에 도착해 영사관으로 갔다. 영사관은 버스가 도착한 곳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었고 비자도 너무 간단히 발급해 주었다. 여권을 복사하고 25달러 내고 서류 한 장 작성하니 끝이다. 그 자리에서 비자를 주었고 영사관은 여행정보와 작은 선물까지 주었다. 이렇게 쉽게 받는 걸 멕시코 여행 중에 미리 받았으면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하고 있었다. 국경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게 완전히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면 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게 현명했다.

그날로 국경도시 시우디다드 쿠아우테목으로 가 출국수속을 밟았고 과테말라의 라 메시야로 입국했다. 그날이 2월 4일이다. 과테말라의 입국심사 때 공무원들은 동네 아저씨들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벨리즈에서의 유난스럽게 고압적이었던 것과 비교되었다. 그렇게 세 나라의 국경을 헤맨 지 1주일 만에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이후 다른 나라를 넘어갈 때마다 더 긴장하게 되었고, 인접국의 수도에 있을 때 다음에 갈 나라의 비자를 미리미리 신청했다.


지금은 과테말라도 벨리즈도 모두 무비자협정이 되어 있다. 내가 겪었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국가의 성장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실감한다. 한국의 성장한 위상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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