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몸매

by tripall

툴룸(Tulum)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도시이다. 유명한 휴양지인 멕시코 칸쿤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 하는 거리에 있다. 마야문명 유적지인데 다른 마야 유적지가 밀림에 있는 것과 달리 아름다운 카리브해를 끼고 바닷가에 있다.

멕시코에서 실제로 보기 전까지 멕시코에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도 아주 많다. 멕시코 시티 가까이 있는 테오티우아칸, 남쪽으로 내려와서 팔렌케, 치첸이사, 우스말, 툴룸까지. 이집트 피라미드가 무덤으로 이용하려고 지어졌으나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들은 경배의 장소여서 맨 위에는 신전을 세워놓았다. 크기도 거대해서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60미터가 넘는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는 경치들이 좋았고, 유적지를 둘러보며 조각된 문양을 보고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어서 뜻하지 않게 피라미드가 있는 지역을 거의 방문하게 되었다.

툴룸의 피라미드는 크기 면에서는 내세울 게 없어도 바닷가여서 보는 재미가 달랐다. 항구로 세워진 도시여서 바닷가를 따라 돌로 쌓은 성벽이 있었고 돌의 빛깔이 자연스러워 보기에 좋았다. 유적지의 조각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는데 그것이 더 잘 어울렸다. 그곳 해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우러지는 곳이다.


툴룸에서는 해변에 숙소를 정했다. 시내에 있는 호스텔이 다 차기도 했고, 해변 쪽이 유적지와 가까워 유적을 보고 나면 해변에서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숙소인 카바냐코팔은 방갈로식 구조였고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어 한적함을 즐길 만했다. 그런데 도착한 날부터 파도소리가 거셌다.

도착한 다음 날 유적지를 다녀와서 피곤한데도 숙소 앞 해변으로 나갔다. 수영복을 입고 랩스커트를 걸치고 나왔는데 파도가 겁날 정도로 거세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전에는 바람이 잠잠했었는데. 해변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즐거움을 대체하려고 자리 잡고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술이라도 부린 듯 뿅, 한 남자가 나타났다. 책을 읽느라 주변을 못 본 상태여서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캐나다 사람이고 항공기 조종사란다.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일한 적이 있고 아프리카에도 갔었다고. 내가 갔던 곳들 얘기가 나와 묘한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시내에서 바비큐 파티가 있는데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남자와 미국인 2명과 함께 택시를 타고 파티 장소로 갔다. 플라멩코보다 여러 개의 북으로 연주한 공연을 더 흥미롭게 보고 같이 택시로 돌아왔다.

그 뒤로 어떤 얘기가 이어질지 궁금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다. 같은 숙소여서 마주치기는 했어도 더 이상 얘기할만한 일은 없었다. 이성으로 느껴지는 그 남자를 대하기가 좀 불편했던 것 같다. 보통 여행지에서 만나면 나누는 이메일 주소도 묻지 않았다. 헤어지는 인사도 못 하고 툴룸을 떠났고 다시 만날 인연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신기루처럼 기억되는 사람이다.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일은 그다음 날에 일어났다. 여전히 바람은 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숙소 앞 해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배낭여행자에겐 드문 기회인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수영은 이미 포기했고, 해먹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다가 낮잠이라도 잘까 했는데 바람이 세서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바람에 모래가 섞여 날아와 옷 위에 쌓일 정도였다. 바람이 덜 타는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어서 거기엔 앉는 해먹만 남아 있었다. 앉아서 잠자기는 불편해 친구에게 엽서를 쓰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있었다.

그러다가 발가벗은 채로 걸어오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옆에서 같이 걸어오는 젊은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수건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수건은 어깨에 걸치고 자기 몸을 보여주고 싶다는 듯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자랑하고 싶은 멋진 몸매도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 순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도. 누드 비치도 아닌데 꼭 저래야 하나 싶었다.

내 말에 편견이 있는 건 인정한다. 젊고 멋진 몸매면 나체로 다녀도 된다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그 할아버지가 벗고 다닐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거기에 어떤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나체로 다니는 것을 금한다고 쓰여 있지도 않았다. 단지 그 상황이 내게 충격적이었는데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할아버지가 어떤 의도로 그랬건 다른 사람의 반응을 걱정할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됐든 이목을 끌고자 했던 목적은 충분히 만끽하셨을 것이다.


툴룸에서는 결국 수영을 못 했다. 날씨가 흐려서 내가 좋아하는 일몰도 멋지지 않았고 일출도 구름 뒤에서 벌어졌다. 바닷가에서 여유작작하게 즐기려던 건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아 부족한 감은 있었어도 툴룸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많은 도시 가운데서 선명히 기억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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