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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다시 찾은 베네치아

시칠리아 여행기 16 : 베네치아

by 이지
카타니아 공항

KF94 마스크를 쓴 채로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했다. 시칠리아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동양인은 우리뿐이었고 한국 포털에서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 뉴스가 도배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저녁 10시 늦은 시간이었고 호텔의 셔틀버스 서비스가 마감되어 택시로 호텔까지 이동해야 했다. 예약한 호텔은 공항과 베네치아 시내 사이에 위치해 공항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다. 오랜 이동으로 피곤했고 허기졌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남은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날 밤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가장 좋았던 여행지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아쉬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의 끝자락에는 다음 여행에 대해 상상해보곤 한다. ‘다음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거야.’, ‘방콕 카오산 로드에 다시 가고 싶어.’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다음 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어떤 계획도 섣불리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으며 여독을 풀었다. 여행기간 내내 아침 식사는 숙소에서 요리를 해 먹거나 마트에서 산 간편식으로 해결했다. 오랜만에 호텔 조식을 먹으니 편하고 든든했다. 식재료를 손질할 필요도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어 좋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의 든든함과 소중함을 다시 느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호텔에서 베네치아까지 호텔 셔틀이 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바다를 가로질러 베네치아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넜다. 광장의 주차장은 버스들로 가득 찼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을 뚫고 베네치아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어느 골목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다 위에 세워진 도시 베네치아는 골목길이 굉장히 복잡하다. 10년 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베네치아에 도착한 우린 목적지를 찾다 길을 잃는 일이 수두룩 했다. 같이 여행을 온 막내는 성당에서 미사를 보겠다며 혼자서 성당에 갔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숙소로 돌아오지 않던 막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형, 길을 잃었어요. 도와주세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한 동생을 찾으러 길을 나서야 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10년 전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했고 2박 3일의 일정으로 베네치아에 들렸었다. 한국인 할머니가 홀로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며 아침, 저녁을 한식으로 든든하게 먹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머물렀던 형은 우리에게 맥주를 사주겠다며 우리를 바에 데려갔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어요.' 유럽에서 가이드를 하던 형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년 만에 삼십 대가 되어 다시 돌아온 베네치아의 골목을 걷다 보니 작은 펍에서 맥주 한잔에 신이 나서 떠들던 이십 대 초반의 내가 어제의 일이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칠리아 베네치아, 카사노바의 다리

리알토 다리와 성당 앞의 광장 또한 10년 전과 비교하여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10년 전에는 공사 중이어서 보지 못했던 카사노바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10년 전 추억과 함께 앞으로도 이 자리에 머물며 내가 흩뿌려 놓은 추억들과 함께할 것 같았다.

베네치아 구경을 마친 우린 호텔로 돌아와 짐을 쌌다. 캐리어는 기념품과 선물로 가득 찼다. 긴 비행을 위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비행기 안에서 써야 할 태블릿 PC와 충전기를 챙겼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13박 14일의 여행이 모두 끝이 났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여행을 다니며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보며 사진을 정리했고, 함께 사용했던 공금을 정산했다.


여행을 마칠 때면 허무함 같은 것이 몰려왔다. 낯선 이 도시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기만 하는 관광객의 신분을 내려놓고 다시 정글 속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여행은 나에게 놀이이면서 탈출이었다. 잠시 정글에서 벗어나 관광객이란 신분이 되어 사파리 버스를 타고 새로운 정글을 여유롭게 구경하는 여행이 좋았다.


"지금 가장 힘든 게 뭐야?"라고 물으면 많은 업무량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학생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거추장스러운 이유를 뛰어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과 어려서부터 시작된 경쟁이 늘 함께 한 것이다. 수능 점수를 더 잘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1개라도 덜 틀려야 했고 임용 시험에서 36등 안에 들어야 했으며 취직과 함께 승진을 하기 위한 경쟁이 펼쳐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누군 누구와 결혼을 했으며 아파트와 주식, 비트코인을 사서 얼마를 벌었다는 등의 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언제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여행이 끝난 아쉬움도 있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는 설렘도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경쟁이 가득한 이곳을 나는 다시 살아가기 위해 돌아왔다.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나의 여정을 그렸다. 집이 숙소가 되고 매일 아침 여정을 시작한다.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함께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출근하여 직장 동료들을 만날 것이고, 집에 돌아와 가족과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주말에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하는 여유를 갖거나 동네에 있는 맛집에 들러 점심을 먹는 날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보고 느끼고 먹고 즐기는 짧은 여정이지만 삶은 길고 멀리 봐야 하는 여행이었다. 나름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이 세계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하루하루에 일상이 무뎌질 때가 있다. 노력하던 나의 모습이 오도 간데 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이 순간이 오면 여행을 떠났고 돌아온 후에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인생이란 여행도 설렐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인천행 비행기에 앉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새로운 여정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가족을 만나고 자주 다니던 맛집을 찾고 엄마의 요리와 김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목표를 다시 한번 세워보고 계획해 본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도 소중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무뎌져 권태로움을 느껴지게 될 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느꼈던 설렘을 다시 한번 떠올려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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