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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 화산, 와이너리 투어

시칠리아 여행기 15 : 타오르미나

by 이지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산장

에트나 화산 투어


아침 7시, 타오르미나 광장에서 가이드를 만나 에트나 화산 투어를 시작했다.
여행 중 이른 아침부터 일정을 시작하는 날은 손에 꼽혔다. 하지만 투어 일정에 맞추기 위해선 예외였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설 때마다 하루를 온전히 붙잡은 듯한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루쯤은 현지 투어를 신청하곤 했다.


평소엔 9시쯤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 시간이 지나 인적이 드문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남들이 일할 때 내가 휴가 중이라는 사실이다. 텅 빈 거리와 조용한 카페, 그리고 한산한 식당이 주는 평온함이 참 좋았다.


옷만 간단히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현지인들 사이를 헤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광장 모퉁이에 벤 차량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 앞엔 목걸이형 마이크를 찬 남자가 서 있었다. 오늘 투어의 가이드였다.

“반가워요. 타오르미나 투어 예약했죠? 이름이...”
“오늘 투어 가이드입니다. 타세요!”

차 안에는 이미 세 커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커플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빠른 영어로 열정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단어 몇 개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충분히 진심이 느껴졌다.

“최근에 눈이 많이 쌓였어요. 다음 주엔 스키장이 열릴 거예요.”


차는 여러 마을을 가로질렀다. 허허벌판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났고, 광장과 카페, 그리고 고양이 한두 마리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그동안 여행했던 큰 도시들과는 다른, ‘살아 있는 시칠리아의 하루’가 거기 있었다.


1시간가량 달리자 차는 산속의 한적한 도로에서 멈춰 섰다. 하늘에 닿을 듯 솟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뒤덮인 숲 사이였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작은 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장은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안에는 소박한 카페가 있었다. 2유로짜리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손난로처럼 쥐었다. 향긋한 커피 향이 퍼지는 사이, 가이드의 설명이 다시 시작됐다.

“길이 험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모두 장비를 착용해야 합니다.”

활화산이라는 말에 약간 긴장감이 돌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어에 참여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가슴 한켠이 묘하게 뛰었다. 두려움과 설렘의 경계였다.


산장 아래 지하창고에는 방한복과 트레킹 장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깨끗한 방한복을 챙겨 입고, 눈길용 아이젠과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가이드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최근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였지만, 장비 덕에 걸을 만했다.


숨결이 허공에 하얗게 흩어지고,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가이드는 몇 년 전 폭발로 생겨난 작은 분화구들을 보여줬다. 눈에 덮여 있지만 그 아래엔 아직도 뜨겁게 살아 있는 대지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그마가 지나간 자리에 생긴 동굴은 마치 지구의 상처 같았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산장으로 돌아왔다.


에트나 화산 투어, 서약서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와이너리 투어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작은 분화구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산장으로 돌아와 장비를 반납한 뒤, 와이너리로 향했다.
에트나 화산 투어에는 와이너리 시음과 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약 20분을 달려 도착한 와이너리는 에트나 산 중턱에 자리한 곳이었다

나이 지긋한 와이너리 주인이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았다.
에트나 화산의 비옥한 토양은 포도 재배에 최적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와인은 ‘용암의 맛’이라 불린다.

가이드는 설명을 이어갔다.
“에트나 화산은 세계 4대 피스타치오 산지 중 하나예요. 시칠리아 피스타치오는 최고죠. 젤라토를 먹어보지 않으면 시칠리아를 본 게 아닙니다!”

그의 말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우리는 오크통이 늘어선 공간 한켠, 둥근 테이블에 앉았다.
모두 한자리에 둘러앉으니 왠지 모르게 오래된 친구들과 식사하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서툰 영어로 인사를 나누자, 각자 알고 있는 몇 마디 한국어를 자랑하듯 꺼내 놓았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그들의 천진한 미소가 여행의 피로를 녹였다.

가이드는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시칠리아 이야기를 쉼 없이 이어갔다.
“최근에도 화산이 폭발했어요. 친구가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 속 불타는 하늘과 붉은 용암의 흐름이, 이상하게도 두렵기보다 아름다웠다.


에트나 화산 투어, 와이너리 식사


스타터로 빵과 치즈가 나왔다. 와이너리 주인이 직접 와인을 따르며 설명했다.
화이트, 로제, 레드 세 가지 와인을 차례로 맛보았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눈 덮인 산의 냉기가 포도 향과 함께 녹아내리는 듯했다.

메인 요리는 시칠리아의 대표 음식 ‘알라 노르마’.
며칠 전 타오르미나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고소한 리코타 치즈와 진한 토마토소스, 그리고 살짝 탄 가지의 향이 어우러져 _입 안 가득 시칠리아의 햇살이 퍼지는 느낌이었다.


에트나 화산 투어


에트나의 검은 땅 위에서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에트나 산 남쪽으로 이동했다.
최근 용암이 분출된 곳이었다. 검은 화강암이 대지의 모든 색을 삼켜버린 듯 펼쳐져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그러나 여전히 생명이 피어나는 곳.

몇 년 전 폭발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화산이 두렵지만, 그 덕분에 포도도 자라고 피스타치오도 열리기 때문이다.
에트나 산의 삶은 풍요와 위험,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에필로그


따뜻한 해 아래에서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삶은 늘 빛과 어둠이 맞닿아 있다.

우리는 때로 이유 모를 불행에 빠져 헤매고, 그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기도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인내와 용기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

불타는 화산의 땅에서도 포도나무를 심는 시칠리아 사람들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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