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01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편지 한 장으로 당시 여자 친구와 끝을 맞이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다툼이 많아졌고, 막연히 헤어지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던 시기였다. 카톡으로 투닥투닥 싸워 연락이 되지 않던 그날 저녁 이메일로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마음속 한 편에 항상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지만 막상 닥치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찾아온 이별의 고통과 고독이 나를 삼켰다.
갑자기 찾아온 큰 빈자리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함께했던 시간의 공백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평범한 하루하루에 익숙해져 딱히 목표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간을 보낼 취미도 딱히 없었다. 그저 일을 하고 연애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던 삶이었고, 갑자기 생긴 시간의 공백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시간들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약이야.'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위로의 결론은 시간이 약이란 것이다. 막상 힘든 시기가 닥치니 이런 위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견뎌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길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길고 긴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곧 시간의 틈 사이로 여러 가지 것들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동네 공방에서 진행하는 여행을 주제로 하는 강연에 참석했고, 오랫동안 들어왔던 여행 팟캐스트의 공개방송과 뒤풀이에 참석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나를 공유하고 또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되었다. 다른 이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악기를 배우기 위해 피아노 학원들 다니고, 시간을 내어 영어 공부를 시작했으며, 관심 있는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된 쿠바에 한참 관심이 생기던 시기에 우연히 쿠바 사진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친구와 함께 쿠바 사진전을 찾았다. 비 때문인지 사람은 거의 없어 텅텅 비어 있는 탓에 조용히 사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전시관에는 쿠바의 사진과 어울리는 그림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쿠바의 모습은 낯설지만 아름다웠다. 낡은 건물은 쨍한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원색의 올드카들이 도로를 달리며, 방파제 위로 들이치는 파도는 도로를 적시고 있었다. 흙빛의 도로와 파란 하늘 그리고 빨간색의 자동차가 모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고 유튜브와 팟캐스트에서 쿠바 여행 후기를 찾아봤다. 쿠바는 북한처럼 공산주의 국가지만 여행자들에게는 안전한 곳이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다. 쿠바에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후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 B에게 전화를 걸었다.
"B야, 쿠바 알지? 우리 이번 겨울에 쿠바 여행 가는 거 어때?"
“쿠바? 잘 모르는데 한번 찾아볼게.”
곧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쿠바 좋은데? 조금 무섭긴 한데.. 가보자!”
A형에게도 여행을 제안했지만 형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93만 원. 꽤나 저렴한 가격에 스페인 마드리드를 경유하는 항공권을 찾았다. 인천에서 마드리드까지는 대한항공으로, 마드리드에서 쿠바까지는 유럽 항공사 비행기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쿠바까지의 가장 빠른 여정은 캐나다나 미국을 경유하여 15시간 정도 이동하는 것이다. 내가 구입한 티켓은 스페인을 경유하여 지구의 2/3바퀴를 돌아 이동하는 편으로 20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이었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마드리드까지 국적기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고 마드리드에서 1박을 하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저렴한 가격도 이 티켓을 선택하는데 한몫했다.
새롭게 시작한 모든 것들이 점차 익숙해졌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모두 할 수 있게 되었고, 캐논 변주곡을 피아노로 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은 평온해졌고 새로운 일들은 다시 일상이 되었다. 쿠바로 떠나야 하는 날이 조금씩 다가오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바라고? 내가 미쳤지 쿠바를 3주 동안이나 간다고?’
평범한 일상에 젖어 들어 편한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내성적이고 겁 많은 성격이 쿠바 여행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여행을 취소하고 싶어요. 취소 수수료가 얼마인지 궁금해요.'
항공권 취소가 될까 하여 여행사에 메일을 보냈다.
‘취소 수수료와 항공사 수수료는 86만 원이에요. 취소하고 싶으면 메일로 다시 알려주세요.’
93만 원인 항공권의 취소 수수료가 86만 원이라니. 메일을 보자마자 영락없이 쿠바에는 가겠구나 싶었다.
A형은 그때까지도 쿠바 여행을 결정하지 못했다. 해외여행을 가면 A형, 친구 B와 항상 함께였지만 이번 쿠바 여행은 친구 B와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나면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고 첫날 묵을 숙소 2일 정도를 예약하면 여행 준비는 끝이었다. 이번 쿠바 여행도 그랬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떠나는 날이 되자 나는 공항에 있었고 여행을 가게 되었다. 한국인이 많이 간다는 까사(숙소) 2개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쿠바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