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03
공강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잘 읽히는 책을 좋아했던 탓에 주로 읽는 책은 술술 읽을 수 있는 여행 수필이었다. 특히 한비야의 여행 이야기는 배낭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게 했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여행의 꿈을 키우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챌린저 프로젝트를 통해 친구들과 유럽에 가게 됐다.
영국에서 5일간의 글로벌 챌린저 프로젝트를 마치고 유럽을 일주할 계획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여행 준비에 특별한 준비 없이 떠나야 했다. 정신없이 떠난 우린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21일 동안 유럽을 일주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때의 여행은 고생 그 자체였다.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식당을 찾는 것도, 여행지를 찾아가는 것도 직접 발품을 팔아야 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테제베를 타고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북역의 문 앞에 섰다. 파리 북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숙소도 정해지지 않았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낯섦이 몰려왔다.
길 옆에 모여 서서 그날 묵을 숙소를 찾기 위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방 있나요? 남자 4명인데 지금 파리에 도착했어요."
인기 있고 잘 알려진 게스트 하우스의 전화번호만 적어왔던 탓에 빈자리가 있는 게스트 하우스는 찾을 수 없었다. 당장 묵을 숙소를 예약해야 했기에 방이 없다는 사장님에게 숙소 소개를 부탁했다. 자리가 있는 숙소를 소개받아 곧장 그곳으로 이동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고 파리 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기차역에서도 한참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파리에 도착한 지 4시간이 지나 자정의 시간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짐을 풀 수 있었다.
2G 핸드폰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종이 지도를 들고 맛집과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여행과 관련된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스마트폰 덕분에 여행을 하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쉬워졌다.
쿠바 여행은 평소 우리가 하던 여행과는 완전히 달랐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쿠바에서는 10년 전의 유럽여행 때와 같이 아날로그 방식이 필요했다. 쿠바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유일한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기에 지도, 수첩, 여행 책자를 들고 여행을 다녀야 했다. 쿠바에서는 파리에서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행하는 방법과 태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야 했다.
(쿠바 아바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 앞)
방금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 몇몇이 공항 앞에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전을 하는 동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공항을 빠져나간 듯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택시를 잡아 아바나 시내까지 이동해야 했다. 공항 문을 빠져나가자 바로 택시 기사가 말을 걸었고 뭐에 홀린 듯 차에 짐을 실었다. 주소가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이곳으로 가고 싶어요. 갈 수 있나요?"
택시기사는 문제없다는 듯 제스처를 취하고 빠르게 출발했다. 1시간 정도 달려 아바나의 중심 까삐톨리오에 도착했다. 까삐톨리오 근처에 위치한 '호이끼나 까사'는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이곳에 묵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다른 준비는 하지 못했다. 당장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수첩에 적혀 있는 까사 이름과 주소뿐이었다.
쿠바는 '까사'라는 숙박 제도를 운영 중이었다. 쿠바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반 가정집에서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도록 했다. 쿠바 주민들은 빈 방을 빌려주며 아침을 제공하고 보통 1박에 10~15 쿡 (한화 12,000~17,000원)을 받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인지 길은 어두웠고 거리에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소만으로 숙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캐리어와 수첩을 들고 까삐톨리오 주변을 한 시간 정도 헤매었다. 길을 지나던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고, 우리가 지나왔던 길을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안 되는 상황에서 숙소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한 건물 앞에 서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머리 위에서 낯익은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국분이세요? 앉아 있는데 소리가 나서.."
"네, 지금 도착해서 호이끼나 까사 찾고 있었어요."
"여기가 호이끼나예요. 잠시만요!"
옆에 있는 큰 문이 활짝 열렸다. 호이끼나 까사에서 묵고 있던 한국인이었다. 숙소 거실에서 한국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 목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렸던 것이다.
겨우 도착한 호이끼나 까사에 빈 방은 없었다. 까사를 운영하는 노부부는 다른 까사에 전화를 걸어 방이 있는지 확인해 주었지만 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우린 거실 한편에 있는 소파 위에 이불을 깔고 자기로 했다. 소파는 움푹 들어가 있어 허리가 아팠고 이불은 언제 산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되어 보였다. 30시간이 걸려 겨우 도착한 쿠바는 만만치 않았다. 거실 불을 끄고 소파에 누운 우린 낄낄 웃었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여행을 다니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바나에서는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은 아무것도 작동되지 않았고, 아날로그의 삶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마트폰, 핸드폰이 없던 어린 시절 친구와 만나기 위해서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그곳에 서서 친구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친구와 전화 통하라도 하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고 친구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가 전화를 받으면 나를 소개하고 친구를 바꿔달라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이었다. 많은 생각이 필요했고 기다림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을 어쩌면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감정들과 고민들을 지금 이곳 쿠바에서도 다시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나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