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10 : 프랑스 파리
파리의 거리를 조금만 걸으면 도시가 얼마나 정돈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지 금세 느낄 수 있다. 쭉 뻗은 거리에는 비슷한 양식의 건물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은 도로는 완벽하게 계산된 도시의 미학을 보여줬다.
한낮의 햇살 아래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눠다. 골목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섞였고, 그 틈을 따라 관광객들이 흘러다니는 듯 했다. 밤이 되자 노란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파랗게 어두어진 하늘이 그 불빛을 받으며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빛났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보고 있던 건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예술이었다.
몽마르뜨 언덕
해 질 무렵, 우리는 파리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빠져나오자 도시의 매끈한 거리 대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우리를 맞았다. 벽마다 오래된 낙서와 포스터가 겹쳐 있었고, 작은 카페마다 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때 이 언덕은 쫓겨난 예술가들의 피난처였다. 도심의 변화에 밀려난 이들이 모여 서로의 예술로 위로하던 곳. 그들이 남긴 숨결이 골목마다 남아 있었다. 광장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골동품을 파는 노인, 초상화를 그려주는 젊은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계단에는 사람들이 앉아 파리의 하늘을 내려다보았고, 그 하늘은 지독히도 자유로워 보였다. 바이올린 선율이 바람에 실려 퍼졌다. 그날 몽마르뜨의 저녁은 음악이 아니라, 청춘이 연주하는 시간 같았다.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개선문을 향해 걸었다. 거리의 불빛은 금빛으로 번지고, 그 끝에 거대한 석조의 문이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생각보다 컸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숨이 찼지만, 꼭대기에 다다르자 도시 전체가 손바닥 위에 놓인 듯 펼쳐졌다. 균형 잡힌 건물들의 지붕 사이로 에펠탑이 솟아 있었다. 그 풍경은 완벽했고, 동시에 조금 슬펐다. 이토록 완벽한 도시에서조차, 우리는 늘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에펠탑
늦은 밤, 우리는 에펠탑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멀었고, 결국 길을 잃었다. 막내가 지나가던 프랑스인에게 말을 걸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웃으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직접 에펠탑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파리에서 받은 첫 번째 친절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느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여행이 주는 가장 인간적인 위로였다.
에펠탑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개선문 위에서, 몽마르뜨 언덕에서, 거리를 걸으면서 높이 솟아 있는 에펠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서 보는 에펠탑만큼이나 가까이에서 보는 에펠탑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파리의 거리와 건물들이 에펠탑과 어우러져 아름답고 진정한 '파리'를 완성했다.
도시의 야경을 보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은 배낭여행의 클라이맥스이다. 멍하니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여행하며 느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돌이켜볼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야경과 음악이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파리의 야경은 3주간의 여행을 다시 돌이켜 보며 감상에 빠지기에 딱 좋았다.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철제 구조물은 거대한 별처럼 서 있었다. 도시의 불빛과 어우러진 그 모습은 완벽히 파리였다. 그 순간, 나는 사진 대신 눈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귀국, 그리고 서울
21일간의 여행이 끝나고 비행기는 인천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스쳐 갔다.
유럽의 낭만 대신 현실의 냄새가, 파리의 노을 대신 형광등 불빛이 내 앞에 있었다. 강남역 정류장에 내리자,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학식을 먹으며, 유럽의 기억은 점점 현실의 소음 속으로 희미해졌다.
하지만 어느 날 술자리에서, 친구의 웃음소리 사이로 문득 그 시절의 우리가 떠올랐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서로를 찾아 헤매던 우리. 그때의 외로움과 설렘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그때의 추억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서점에 들러 여행 수필을 집어 들고, 또 다른 지도를 펼쳐 본다.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늘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