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 09 : 프랑스 파리
스위스를 떠나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전날까지 숙소를 예약하지 못한 우리는, 기차역 앞에서 종이 한 장에 적어온 숙소 번호를 하나씩 눌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기가 많은 숙소들은 이미 만석이었다. 마지막으로 걸었던 전화에서야 사장님의 소개를 통해 숙박이 가능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심에서 지하철로 30분 거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쳐 있었지만, 우리는 다시 낯선 도시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민박 사장님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10분 남짓 걸었다. 숙소는 상상하던 파리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회색빛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었고, 공기에는 오래된 습기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빛나던 도시의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시간은 이렇게 멈춰 있었다. 마당 문을 열자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낯선 도시에서 '사람 소리'만큼 따뜻한 것은 없다는 것을.
남자 방에는 이미 여러 명의 여행객이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 틈에서 잠시 망설였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웠지만, 웃음소리가 자꾸 귀에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이제 막 시작했어요. 같이 마셔요! 맥주는 공짜예요. 사장님이 준비해 주셨어요."
누군가의 권유가 그렇게 간절하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맥주 캔을 하나 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여행, 각자의 사연, 그리고 각자의 외로움이 흘러나왔다. 모두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엔 잠시라도 혼자가 아니고 싶다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그건 젊음의 외로움이자,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유럽의 한인 민박 문화가 지닌 매력을 처음 알려주었다. 낯선 도시에서 같은 언어로 웃는 일. 그건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조용한 증거였다. 누군가의 기타 소리, 김치 냄새, 한 캔의 맥주.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그날의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 그때의 우리는 각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여행자였지만, 잠시 같은 밤을 살았다.
훗날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가 생겨났다.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 매일 밤 열리는 파티들. 낯선 여행자들이 모여 서로의 삶과 방황을 이야기하는 풍경. 그 시작은 아마 이런 밤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을 나누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른 이의 외로움을 위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