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공익적 목적으로 법철학 입문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를 빠르게 마무리 짓고 다른 시리즈를 연재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당분간 공식 연재일이 아니라도 빈번하게 법철학 입문 시리즈가 업로드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대의 법철학 : 자유법론
앞서 살펴본 개념법학은 법률을 일종의 '함수'로 파악했습니다. 함수가 미지수에 a라는 값을 넣으면 모종의 연산과정을 통해 b라는 결론을 자동적으로 내놓는 것처럼, 법관의 재판과정도 a'라는 사건을 넣으면 b'라는 판결을 그 어떤 '주관적 요소'도 개입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로써 개념법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은 객관적'이라는 확신을 유포시켰고,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시대적 맥락에 있어 '법적 안정성'이라는 요구를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를 지나고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기존의 법률이 미리 예견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거나 법률이 개정되는 속도가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를 따라잡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법이 현실과 맞지 않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념법학이 제안하는 법해석의 형식논리적 방법, 즉 유추, 확장, 연역 등의 방식으로는 당대의 현실을 법질서와 조화롭게 해석하여 사건 당사자들 모두가 만족하고 사회 질서도 바로잡는 판결을 내놓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유법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개념법학을 비판하며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개념법학의 대전제인 '법률의 무흠결성'을 부정했는데,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입법자들도 인간이기에 현실의 법률은 '모순, 오류, 부정의' 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유법론자들은 법관들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법률로부터 구할 수 없을 때는, 당시의 사회 관행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관 자신의 '양심'과 '법감정'에 근거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푹스(Ernst Fuchs, 1859~1929년)와 이자이(Hermann Isay, 1873~1938년)에 의해 발전되고 칸트로비츠(Hermann Kantorowicz, 1877~1940년)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자유법론 혹은 자유법운동(Freirechts-bewegung)은 따라서 법률가의 임무는 제정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법발견(Rechtsfindung)이라 주장하게 됩니다. 물론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이들은 빠르게 전성기를 맞이한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든 운동이었습니다.
칸트로비츠는 개인 혹은 공동체의 관행과 법적 확신에 근거한 '자유법(freies Recht)'이 실정법의 흠결을 보충한다고 보았는데, 이 자유법마저 흠결이 있는 경우에 법관은 실정법의 문언을 넘어서는 법창조(Rechts-schöpfung)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법관의 사법적인 재량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래서 당면한 사건에 대해 법관이 무슨 판결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에 관해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학설이 되어버렸고, 결국 법학방법론으로서의 위상이 애매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유법론은 열기가 가라앉게 되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칸트로비츠가 법관이 '사회학적 사실'을 판결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법사회학의 핵심 테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선구적인 발상들은 그들을 여전히 학계에서 언급되는 인물들로 남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근대의 법학 : 일반법학
산업화와 그로 인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경제 속에서 지극히 복잡해지는 당시의 상거래 관행을 '예측가능하게' 규율하고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필요는 개념법학의 등장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커져왔습니다. 따라서 당대 법철학자들은 무엇보다 법은 누가 따져보더라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도덕이나 자연법, 즉 '올바른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법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객관성'에 대한 집착은 이들을 누구에게나 눈에 똑같이 보이는 실정법에 천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정법만이 그들에게 있어 법학의 유일한 토대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잡한 사회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제안된 온갖 법리와 학설들이 난무하던 당대 법실무를 교통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법영역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법개념과 법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통합하는 일반법학(Allgemeine Rechtslehre)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년)는 이 일반법학의 등장을 두고 "법철학의 안락사(Euthanasie der Rechtsphilosophie)"라고 표현했습니다. '올바른 법'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이상, 법철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 셈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일반법학은 현재까지 영향을 끼칠 만한 학술적 기여를 많이 남겼습니다. 우리가 민법, 형법 등 개별 법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개념과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을 '총론'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반법학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일반법학은 민법의 영역에서 사비니와 푸흐타의 후계자들, 특히 빈트샤이트를 위시한 판덱텐법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다시 한번 일반법학이 개념법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민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법학의 제영역으로 그 학술 영역이 확대되면서 일반법학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근대의 법철학자 : 베르크봄
베르크봄(Karl Bergbohm, 1849~1927년)은 가장 극단적인 법실증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는 법의 유일한 존재 기준은 오직 실정성이라고 봤습니다. 국가의 권위 있는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된 사실이 있다면 아무리 극악한 법률이라도 그 이유만으로 폐기되기 전까지는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뒤집어 해석하면 현실에서 제정된 사실이 없는 자연법은 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에게 자연법은 '있어야 할 법'일뿐이고 당위의 차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법이란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로 머물러야 한다고 봤고, 따라서 법학에서 '당위'조차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흠결이 완전한 무오류의 실정법을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형식적으로' 해석하기만 하면 모든 사건에서 기계적인 판결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봤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르크봄에게 법학은 공학에, 법률가는 기술자에 가까웠습니다. 오로지 실정법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모든 사항을 철저히 법학은 물론 법철학의 영역에서도 추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르크봄은 현대에는 잘 언급되지 않고 찾아도 자료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잊혀가는 법철학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그런 주장을 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시대적 맥락에서 의의가 있기 때문에 '베르크봄'이라는 이름만은 꽤나 알려져 있습니다. 저 또한 이런 차원에서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