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세미 락다운 12일째.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마리나 베이 공원에서 음주는 안되지만 음료는 가능한가 봐요. 조깅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쌍쌍이 앉아있는 게 보이네요. 편하게 잘 쉬고 계시나요? 보고 싶어요.'
당장 살고 죽는 문제가 걸려있어 언니와의 약속도 취소하고 끙끙댔는데 숨통이 트이고 보니 그 사람 생각이 먼저 난다. 사랑은 사랑인가 보다. 몇 번 문자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는 같은 공원을 다른 시간에 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해가 들어가 선선한 저녁에, 언니는 햇살이 쬐기 전의 아침에. 나는 마리나 베이의 야경을 좋아했다. 모든 싱가포르가 몽땅 그 빛무리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밤 8시에서 10시 사이에 조깅을 한다는 나에게 언니는 이렇게 답장했다.
‘해인 씨는 밤에 오는구나. 난 해를 너무 좋아해서 아침에 뛰어요.’
해를 좋아한다니. 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예쁘다. 태양이 좋아서 뜨는 해와 같이 둥그런 공원을 조깅하는 그녀를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 어쩐지 어깨에서 햇살 내음이 난다 했어. 웃을 때 온 방이 밝아지는 것 같다 했어. 해를 좋아해서 그랬었구나. 말도 안 되게 뜨겁고 빛나는 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눈이 부셨구나.
쭈뼛쭈뼛 언니만 괜찮다면 같이 뛰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흔쾌히 그러자고 말한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어제 저녁에 드디어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에 같이 조깅할래요?’
뜀박질은 다리가 하는 일인데 눈치 없이 가슴이 먼저 뛴다. 쿵쿵 쿵쿵. 쿵쿵쿵. 갈래요. 뛸래요. 무조건 같이 할래요. 바보 같은 답장을 하고 알람의 시간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아침 8시에 머라이언 분수 앞에서 보기로 했다. 멍청하게 못 일어날까 봐 베개에 머리를 대고 주문을 외웠다. 여섯 시 반에 일어나야 해. 여섯 시 반에 일어나야 해. 여섯 시 반에 일어나야 해.
그리고 오늘, 오늘 아침!
드디어 그녀를 만나고 왔다.
뛰어왔다며 숨을 몰아쉰 언니의 오른쪽 맨 등에는 날개가 있었다. 왼쪽 귀 뒤부터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문장도 한 줄 있다. 팔 한쪽은 연꽃으로 덮였고 쇄골은 수선화가 덮였다. 언니의 몸에는 그림이 아주 많다. 문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 늘 어두운 밤에 가게에서만 만난 터라 맑은 태양 아래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훤히 파인 운동복을 입고 온 언니의 맨살에 눈 둘 바를 모르고 조금 허둥거렸다. 건강하고 결이 예쁜 구릿빛 피부. 얼마 전 작정하고 태닝 오일을 바르고 뛰어서 겨우 색을 냈다는 피부. 무서우리만치 잘 어울린다. 열대 섬에서 태어난 것만 같은 미인이다.
조깅하겠다고 해놓고 코랄색 립을 바른 입술에 정신이 팔리긴 했지만, 그래도 빠른 걸음으로 마리나 베이 공원을 두 바퀴나 돌았다. 오랜만에 말도 많이 했다. 내가 성대를 쓰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내 귀에 날아드는 언니의 목소리에서 백사장 같은 시원함이 느껴진다. 신기한 사람이다. 봐도 봐도 예쁘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나는 헛소리만 지껄인다.
“어제 조깅을 하는데 마리나 베이 샌즈가 보이는 다리에 망원경 같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주르륵 서있더라고요. 대체 뭔가 했더니 개기 월식이 있는 날이었어요. 뿌옇게 구름이 껴서 달은 보이지도 않는데, 다들 누가 먼저 백기를 드나 해보자는 듯이 버티고 있는 거예요. 달이 먼저 나오나, 짐 챙겨서 집에 가나 내기하는 것처럼. 저야 뭐 늘 하던 대로 한 바퀴 돌고 집에 왔는데, 구름에 가려서 귀한 월식을 제대로 못 본 건 좀 아쉽더라고요. 그런데 보니까 싱가포르가 건물을 정말 조형적으로 잘 짓는 것 같아요. 그 다리에서 보는 달이, 딱 마리나 베이 샌즈 왼쪽에 가장 멋진 각도로 걸리고 그 옆에는 또 관람차가 있게 만들어 놓은 거 있죠. 참 잘 배운 변태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별 쓸데없는 이야기들에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준다. 언니의 직업 때문일까, 대화 중에 언니는 항상 듣는 쪽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질문들을 빼고서는 언니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다. 커밍아웃을 하고도, 여자가 고백을 해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매력적인 사람. 내가 이렇게 코알라처럼 들러붙어 언니, 좋아해요, 좋아해요 종알거려도 태양처럼 웃으며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센토사나 갈까요.’라고 말하는 사람.
인생에 이런 사람은 처음이다. 이렇게 마음껏, 당당하게, 숨기지 않고 여자를 좋아해 본 것도 처음이다. 모든 것을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데이트를 하자며 농담하는 사람은 정말, 정말 처음이다. 한국에 가기 전까지 언니와 만나는 모든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해야겠다. 분명 오랫동안 보석처럼 남을 추억이 되겠지.
오늘 저녁에도 마리나 베이를 뛸 것이다. 얼른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 목소리와 웃음을 되뇌이면서.
2021 싱가포르 세미 락다운 12일째, 출국 8일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