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재외국민투표를 마치고 말라가로 돌아와 일주일을 골골거렸다. 연휴 마지막 날 오후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밤 9시부터 잠이 들어 내리 10시간을 자고 출근했는데도 피곤이 가시지 않고 여독을 풀어내는 데 무려 일주일이 걸렸다. 좀 많이 걸어 다니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피곤할 일인가. 장기 배낭여행도 아니고, 몇 번이나 가 본 곳의 3박 4일 여정이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휴가나 연휴 때는 마지막 날까지 꽉 채워 놀고 돌아와도 다음날 멀쩡히 잘만 출근했는데. 매일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어휴, 이제는 무조건 하루 일찍 돌아와 하루는 풀 회복을 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왜 피곤한지 알 것도 같았다.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호스텔 도미토리룸에서 묵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서 잔 건 5년 전쯤, 코스타리카의 한 혼성 도미토리룸에서 흉한 일 겪은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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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토리 트라우마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호스텔에 묵을 생각을 하게 된 건 다가올 부활절 연휴 때 단기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순례자들은 보통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묵는데 보통 혼성 도미토리인 그곳에서 지내는 게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 연휴 때문에 마드리드 괜찮은 숙소는 이미 예약이 다 찼고, 예약 가능한 곳은 컨디션에 비해 너무 비싸고, 가격이 괜찮다 싶으면 중심지에서 너무 멀거나 후져. 그럼 차라리 시설 좋고 깔끔한 호스텔에서 자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알베르게 예행연습도 할 겸.
고민 끝에 결국 6인실 여성 전용 도미토리룸을 예약했다. 바를 겸하고 있어 잔뜩 들뜬 분위기의 호스텔 라운지를 낯설어하며 체크인을 하고 무려 2.5유로에 수건을 빌려 도미토리룸으로 들어갔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세 개의 이층 침대가 각각 벽을 보고 있는 나름 신식 구조였다. 아직 아무도 없는 도미토리 방 안애 짐만 얼른 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저녁 다시 호스텔로 돌아오니 어라, 침대 위에 놓고 나갔던 수건이 사라졌다? 아니 무슨, 뭐 훔쳐갈 게 없어서 수건을 훔쳐 가나? 돈 주고 빌려야 하는 건데! 리셉션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다시 받아왔지만 어이없고 황당한 마음과 동시에 수건을 훔쳐갈 정도면 뭐든 못 훔쳐가겠냐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귀중품이야 늘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가져 다니지만 충전기라든가 치약 같은 것도 훔쳐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잠깐 화장실 가거나 자리를 비울 때도 침대 위에 뭘 편하게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혹시 쟤가 가져갔나? 이런 의심을 하게 되고.
거기다 마드리드가 나이트 라이프의 도시 아니랄까 봐 다들 밤 열 시쯤 나가서 새벽 두세 시쯤 들어와서 부스럭거리는데, 귀마개에 눈가리개까지 하고 있었건만 한숨도 못 잘 수 없었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이렇게 뚫려 있는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자는 거 자체가 너무 불안했다.
대체 옛날에는 어떻게 여기서 꿀잠을 잤지? 그것도 혼성 도미토리에서? 싱글룸은 외롭고 무서워서 도미토리에서 묵는 걸 훨씬 좋아했던 때가 있었는데. 숙소에 딱 돌아오면 짐을 풀어 도미토리 침대 위에 착착 올려놓고 내 집처럼 흐뭇해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던 페리 안에서는 방을 에약하지 않아 선상의 카페 소파에서 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 같고.
나한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배낭여행자로서의 한 챕터가 완전히 넘어갔다는 사실을. 도미토리에서 즐겁게 자고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젊음의 특권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충전해야 할 잠만 잔뜩 쌓인 채 순례길 예행연습은 실패로 끝났고, 알베르게에 대한 걱정은 전혀 덜어지지 않았다. 뭐,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과 여행의 목적, 상황 자체가 다르니까 그때는 이번 경험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 같이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 여행자가 아니고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전히 숙박비에 큰돈을 쓰는 건 아깝지만, 하루를 집처럼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개인실에 돈을 내며 맛있는 걸 찾아서 먹는다. 그렇다고 내가 더 이상 배낭여행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꼭 필요한 짐만 챙겨지고 다닌다는 점에서 여전히 배낭여행자에 가깝다. 여행뿐 아니라 사는 것도.
한국에서 2년을 보내고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스페인으로 떠나며, 앞으로 이 두 개의 여행가방에 들어갈 짐만큼만 가지고 살자 마음 먹었다. 어디를 가고 어디에서 살게 되든, 미련 없이 쉽고 가볍게 이동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배낭여행자로서의 다음 챕터에서는 내 인생의 여행 가방에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할 것들을 알아 가는 과정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