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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는 바깥을 비춘다.

등대 안의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by 유노유보

어둠 속의 등대는 배들에게 길을 비춘다.

하지만 그 빛은 등대 바깥을 위한 것이지, 등대 안의 사람들을 위한 빛이 아니었다.

등대 안의 등대지기는 외롭다.

등대 안에서 나는 외롭고, 지치고, 값싼 부품이었다.


2015년, 나의 자기 방어기제를 지탱해 준 한 축이 무너졌다.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점점 더 성장했다. 그러나 회사가 속한 재벌 대기업집단은 오죽 정권에 밉보였으면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 따위의 그로테스크하고 낯 뜨거운 광고를 곳곳에 내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다니던 회사는 더 이상 대기업이 아닌 “게임회사” 그 자체가 되게 되었다.


물적 분리로 인해 회사는 ###게임즈로 독립하게 되었고, 더 이상 모 그룹의 임직원카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회사는 연봉과 복지를 올려줬지만, 2년 차에 이르러 이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2014년 12월 19일에 SNS에 올렸던 글을 다시 봤다.


이번 주는 대박 그랜드 슬램이다.
일요일 12시 20분 퇴근
월요일 12시 40분 퇴근
화요일 12시 20분 퇴근
수요일 10시 30분 퇴근
목요일 11시 30분 퇴근
내일 밤 회식 예정
토요일 송년회
...


2년 차가 되자 취업준비하는 학교 후배들이 가끔 회사 어떻냐고, 기대에 차서 물어본 적이 있다. 구글 등의 예시를 말하며 “수면실, 샤워실, 헬스기구, 탁구대, 안마의자까지 있고 거기서 경치도 볼 수 있는 건 진짜 좋은 거 아니에요?”라는 식의.

난 그럴 때마다 그냥 웃었다.


회사 독립 기념으로 준 떡에 그려진 공룡 그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림의 떡과 떡의 그림 중 더 효용성 있는 건 무엇인가. 떡의 그림은 먹기라도 할 수 있으니, 백설기 위에 그려져서 좀 더 단 맛이 나니까 더 좋은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정말 좋은 회사라면,

수면실과 샤워실이 대체 왜 필요할까?


게임 속 캐릭터에게 타격을 입거나, 타격을 입힐 때, 우리는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이 아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타격이나 보너스의 상황을 “빛” 등의 이펙트와 함께 나타나는 “숫자”로 인지하게 된다. ###게임즈에서의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었다. 나의 월급, 생활비, 시간. 내가 이곳에 묶여있는 시간, 갈굼을 받는 시간 속에서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 삶 속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는 점점 알 수 없던 시간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와 같았다. 난 게임을 만드는 곳에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해야 했다. RPG. 롤플레잉 게임처럼. RPG의 캐릭터에게는 그 게임의 스토리에 맞는 역할이 있을 뿐이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의 Role은 아침부터 밤, 새벽까지 계속됐다. 나의 삶은 곧, 그 게임 속의 “삶”이어야만 했다. 늘 게임을 생각해야만 했다.


내 폰에는 늘 회사의 게임 11~13개가 깔려 있었다. 재미있는 게임도, 재미없는 게임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비교하기 위한 레퍼런스용 타사 게임들도 깔려 있었다. 군대 식고문과 같은 괴로움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회사가 짜 놓은 ‘스토리’, ‘전략기획’, ‘위대한 게임 문화 회사”란 외침 안에서 돌아가는 이야기였고, 삶이었다. 회사는 나를 움직이는 플레이어였고, 내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에게 돈을 들여 아이템을 바꿔 주고 미친 듯이 플레이하듯이, 그들도 내게 돈을 주고 나를 플레이했다. 주인공 계정도 아닌 수천의 서브계정 중의 하나로서.


모든 인간이 유일하게 평등하게 갖고 있는 재화,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위하여, 내가 주체인 시간을 갖기 위해 어떤 소속을 얻고 일을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노동력이라는 재화뿐 아니라 "시간"이라는 재화 또한 팔게 된다. 시간을 사기 위해 시간+a를 파는 것이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그렇다. "시간"이라는 것이 재화의 범위에 들어가는 순간, 그 "시간"조차도 직장인에게는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면 무엇을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지친 몸과 머리를 뉘이며 뭔가를 끄적거리고 뭔가를 보고 즐기다가도, 다시 뭔가에 지나친 "시간"을 쏟는데 아까움을 느낀다. 그 아까움 속의 망설임 속에서도 시간을 계속 지불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요컨대, 투덜대는 데에도 일정한 기력, 여유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힘든 것이다. 나의 책임에는, 직장에서의 책임 못지않게 나라는 인물의 사회적 존재에 대한 책임, 그리고 내 주변에 대한 책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시간은 재화가 되고, 내 재화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여야 마땅한 것이 된다.

"낭비"는 최소화되어야만 했다.

낭비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재충전"이라고 합리화하면서도 말이다.


그 시절,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부모님 집에 갔다.

엄마 밥이라고 다 맛있진 않았다. 솔직히 좀 짤 때도 있었다.

엄마는 "살찌니까 조금만 먹어"라고 타박하지만,

다 먹고 나면 항상 내게 "더 먹을래?"하고 물었다.

밥값을 낸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는 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집밥을 못 먹는다는 건, "돈을 안 내도 되는" 관계와 경험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직장인이 집밥 먹고 싶다고 한탄하는 건, 한식부페같은 가정식 먹고 싶단 말이 아니라,

"집에 좀 보내줘"라는 간절한 절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삶을 찾기 위해 나는 더욱 내 시간을 쪼개 썼다.

퇴근하고 바로 씻고 자는 삶을 필사적으로 피했고,

두 시간, 한 시간이라도 드라마를 보든 게임을 하든

필사적으로 “취미”라고 부를만한 것을 향해 분투했다.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소원은 오늘 출근해서 오늘 퇴근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더 큰 꿈은, 오늘 내가 나답게 살고, 내일도 나로서 설 수 있는 삶이었다.

등대 바깥의 빛이 나에게도 희망이고 재미이고 유희이고 행복이길 바랐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그 빛이 닿지 않았다.

등대 안에서 바깥을 보면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더 칠흑 같은 어둠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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