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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밑에 지하실

첫 실업급여를 받기도 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대가

by 유노유보

귀국 2주 만에 퇴사를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보다 하고 싶은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실업급여 신청을 해야 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오후,

실업급여 수급신청을 하러 서울남부고용지청에 다녀왔다.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취업성공 패키지" 신청 창구가 보였다.

아주머니 2분이 직업상담사 과정이 몇 개월에 얼마다 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창구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반도체 검시원 일을 그만둔 다음에 그 취업성공패키지를 통해 간호조무사 교육을 국비로 받았었다.

그리고 그 패키지 몇 달 내내 엄마는 2년 전의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략 몇 십 군데의 병원에서 거절당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나이가 많다고.


그때 엄마가 "너 힘들었겠다." 말하면서 짖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나이 때문에 안 뽑을 거면 차라리 저딴 패키지 제도를 만들지나 말지.라고 생각했다.

엄마아빠 나이에 그렇게 자신이라는 존재가 거부당한다는 게,

얼마나 정서적 좌절감이 큰 지 이 제도의 입안자들은 알고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취업 성공패키지로 차라리 나이 어린 사람들은 금방금방 되는데,

중장년층은 쉽게 취직이 지금도 잘은 되지 않는다.

엄마는 당시에 결국 구직을 포기하고 1주일에 1번씩 등산을 가거나 그림을 그렸다.


아빠는 배관일을 하다가 그해 9월에 낙상을 당했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업체였던 그곳은 절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산업재해를 사업체가 인정한다고 해서 업체가 부담하는 산재보험료가 오르진 않는다.


하지만 무사고 기록이 몇 년 이어졌을 경우,

업종에 따라 무사고 기록 일정 기간 이상 지속 시 보험료 할인 혜택이 있었다.

그럼 사실상 산재를 인정하게 되면 보험료 인상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아빠의 낙상과 요양불승인은, 그래서였을까.

제도의 입안자들은 현실을 알고 만든 것일까.


취업성공패키지 창구를 거쳐 수급자격 신청창구로 갔을 때,

옆 창구 상담원이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언쟁 비슷한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아니... 그러니까 선생님, 나가든지 말든지라고 말한 경우에는 권고사직이라고는 보기가 애매해요. 나가든가 말든가라고 해서 선생님 본인이 선택해서 나간 거잖아요."

"아니 본청에서 나가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다닌 데가 하청인데 블라블라..."

"원청업체가 뭐라고 했든 선생님을 고용한 업체에서 선생님을 해고하거나 사직을 권고했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거죠."

.

.

.

"... 어쨌든 선생님 보시기에는 본인이 권고사직 당한 거라고 생각하신다는 거죠?"

.

.

.

그런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옆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간단했다.

"회사에서 다 처리됐죠?"

"네. 처리되셨어요. 2주 뒤 1차 실업인정일에 오시면 되고요. 블라블라..."


난 끝났고, 나보다 먼저 온 그 아저씨는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당시 그런 생각을 했다. 실업급여를 받아야 하는 흙수저들끼리도, 계급이 있구나.


금수저와 은수저는 뜨거운 불에 녹아내렸고, 흙수저는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글에 "하지만 나의 흙은 고령토가 아니라 미사토였기 때문에 도자기가 될 수 없었다. 고령토는 흙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였기 때문이다. 흙수저들 사이에서도 또 하나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했다."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문득 그 장면이 생각났다.


"권고사직"이란 것을 처리받는 데에도 힘이 드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왜 자신이 낸 고용보험료를 통해 실업이란 사고를 대처하는 데에도 이다지도 힘이 드는 것일까.

나는 저런 어려움까지는 당하지 않은 흙수저라서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뭔가를 불합리하다거나 부조리하다고 느끼기에도 지쳐갔다.

청년실업도 힘들지만, 더 힘든 건 50대 중장년층의 실업이었다.

그들은 자식이 금수저 내지 은수저라도 되길 바라는 게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권고사직을 당하고 자취방에 앉아 있던 나는, 은수저와 동수저의 중간에서 다시 흙수저가 되었다.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니 이야말로 공수래공수거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한없이 어리석었다.

20대 후반의 첫 실업, 1~2달은 나 자신의 재충전을 위해 열심히 놀면서

열심히 사색하며 고민했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난 마치 양극성장애의 "조증"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모든 것에 호기로웠고, 당당하게 나온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정치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 하고 싶은 일이야!라고 되뇌면서.

실업급여 신청 후 최초 1달치를 받기도 전에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경력은 신중히 고민하고 좀 더 진중하고 무겁게 움직였어야 했다.

그런 호기야말로, 나의 경력경로를 이상하게 꼬아버리는 복병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보이는 곳이라고 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또한 그곳이 내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지켜주는 곳인지도,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그것은 "하고 싶은 일" 이전의 중대한 문제다.


그 정치컨설팅 회사는 언론사와 함께 돌아가는 곳이었다.

자신과 계약을 맺은 정치인의 보도자료는 무조건 그 회사가 가진 언론사의 기사로 나갔다.

그렇게 언론보도실적을 내주는 식으로 영업을 했던 그 회사의 대표는 나와 연봉협상을 할 때,

게임회사만큼은 못 준다고 했다.


얼마를 줄 수 있냐고 했더니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더라.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2천만 원"이라고 했다.


그놈의 호기가 문제였다. 박차고 나왔어야 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나왔으니까! 란 생각으로 그 회사에 출근하기로 해버렸다.


사실은 내 안의 울화를 인정하고, 내 마음속 응어리진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만 인정했더라면,

나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안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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