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벼랑 끝에서 만난, 나를 반대한 여자

최저임금 비정규직 자리에서 찾은 something

by 유노유보

두 번째 퇴사 이후,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벼랑 끝이었다.


곧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그 호기로운 선택,

그 선택이 나를 2차 노동시장으로 떨어뜨렸다는 걸.


나는 가난에 민감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대전 신탄진이란 변두리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자취를 하며, 다른 친구들과 나의 차이를 피부로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운동권과도, 비운동권과도 어울렸다.

그러나 누구와 있어도 위화감은 따라왔다.

다들 걱정은 했지만 또 걱정이 없었다.


그들의 걱정에는 거의 늘, 부모님의 지분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내 걱정의 지분은 달랐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걱정의 지분은 한 학기 기숙사 비용 60만 원 정도였다.

1학년 1학기에는 등록금을 내주셨지만, 그 후에는 생활장학금으로 등록금이 어느 정도 깎여서 나왔다.

그리고 반값등록금 시위 이후 "국가장학금"이 도입된 후부터는 등록금을 거의 안 냈다.

한 학기 기숙사 비용보다 더 적은 등록금을 냈으니 말이다.

걱정에도 지분이 있었다.


다른 집,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좋은 부모를 가졌지만,

또한 다른 집,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많은 돈을 지원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다르면, 보통 나는 내 맘대로 했다.

애초에 학비 때문에 인서울 학교가 아니라 성적이랑 우리 형편에 맞춰서 충남대나 가라고 했던 건 아빠였다.

그 말이 상처가 되어 악착같이 재수를 했고, 그래서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홍세화를 읽고 학벌 없는 사회 운운했다.

그러나 수능이 끝나고 나와 같이 놀던 애들이 어디 가고 어디 가고 어디 갔다 란 말을 할 때,

혹은 그들이 내 마음을 읽어 일부러 자신들의 입시결과를 내 앞에서만 말하지 않으면서 결국 다 알게 됐을 때.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

열등감.

좌절.

분노.

또는 그 모든 것들이 섞인 어떤 것들.

그런 여러 가지가 섞인 감정들이 내 안을 휘감았고, 지배했다.


나의 부모님은 따뜻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또는 불효하게도,

어느 정도의 불만과 아쉬움을 갖곤 했다.

나도 대외활동하고 교환학생 가고 1학기 어학연수 가고 취업 스펙도 일찌감치 쌓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연애를 했다.

여자친구는 나와 달리 풍족하고 괜찮은 집에서 잘 자랐다.

우아한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편견이 없었다.


운동권만 따라다니고 알바거리만 열심히 찾아다닌 내가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나는 이 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기에는 집안 대 집안이 아무래도 너무 현격하게 기울었다.

그래서 직장이라도 번듯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업난이 심각했던 2010년대, 내가 대기업 취업에 목을 맸던 이유였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했다.

내가 N사에 합격하기 전에 그녀가 날 떠났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에 가고자 했던 최초의 이유가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목적이 사라졌다.

그러나 멈추지 못했다.

이미 과녁으로 떠난 화살처럼 나는 달렸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목표는 이뤘지만 더 이상 내가 생각했던 목적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마치 곤충의 중앙신경계가 반응하는 것처럼 노력했다.


나는 그저 반드시 2차 노동시장이 아닌 1차 노동시장에 있으리라,

사람들이 욕할지언정 "노동귀족"이니, "대기업 정규직"이니 하는 삶을

한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두 번의 퇴사, 두 번의 실패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의 끝은 다시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청년 정치인의 비례대표 당선을 돕고자 했다.

정치가 나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리 세대"의 어려움을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면 했다.

웨스트윙을 즐겨봤던 사람들.

이상적인 정치를 위해 노력했던 동지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조차 실패했다.

2016년 4월 총선은 제3당인 국민의당이 휩쓸었다.

안철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간의 직장생활로 모아둔 돈은 조금씩, 그러나 단호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같은 학교 출신이기도 했던 K신문의 기자를 알게 됐던 게 유일한 소득이었다면 소득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곳에서 만난 지인이 "서울시 뉴딜일자리 활동가"에 지원해 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비록 최저임금의 일자리지만, 그래도 워라밸은 좋고,

일의 강도가 낮으니 그만큼 다른 것들을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서울형 생활임금"을 주는 일자리로, 최저임금보다는 많이 주는 일자리였지만, 최저임금이라고 말해도 딱히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그래서 뉴딜일자리로 지원할 수 있는 한 시민단체의 면접을 봤다.

면접관이었던 사무국장은 내 연배, 또는 나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여성이었고, 까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면접관 3명 중 2대 1의 찬성으로 나는 나의 세 번째 경력,

7개월 기간제 비정규직, 최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3명의 면접관 중 유일하게 나의 채용에 반대한 사무국장 W는 나보다 3살이 어렸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정치성향"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는 듯해서 부적절해 보였다고 했다.

어쨌든 첫 출근을 했을 때, 그는 능숙하게 업무에 대한 이런저런 안내를 해줬다.


그녀가 나의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란 걸 안 건 그로부터 2달도 더 지난 뒤였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keyword
이전 08화근로계약서는 배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