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근로계약서는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자는 언제나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by 유노유보

강약약강.

그 정치컨설팅 회사 대표에 대한 나의 1줄 요약이다.


연봉협상을 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월급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았고, 다른 직원에게 툭하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한 상무라는 사람은 그를 일컬어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계셔서 그러니 좀 이상해 보여도 이해해~라고 했다.


근데 정작 보도자료 1줄 잘못 쓰고 명함 주문 잘못해 전화번호 오타가 나왔을 때는 그렇게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콜라가 든 얼음컵을 집어던졌던 그 양반은 정작 당시 여당 예비후보였던 H가 계약된 금액 몇 천만 원을 1달이 넘도록 입금하지 않고 있을 때는 그렇게 침착하고, 상냥하게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좀 웃겼다. 나한테는 명함 잘못 나온 거 변상하라며 3만원을 까네마네 하면서 무슨 놈의 경제관념이 그런가?


자기 회사 사람에게는 분노조절장애였지만,

자기 회사 고객에게는 분노조절잘해였다.


뭔가 이상하다, 이쪽 일은 원래 이렇게 험한가? 하고 있던 2주 차의 어느 오후였다.

50대 초반의 경리가 내게 근로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연봉은 1800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3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친다고 되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평가해서 고용관계 계속을 결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너무 화가 났다.

약속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 분명히 2천만 원이라고, 손가락을 브이자로 그리며 말씀하셨었다.라고 따졌다.

그리고 수습 이런 이야기는 없지 않았냐. 이게 대체 뭐냐?!라고 따졌다.

옥신각신 끝에 나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대표님은 퇴직금까지 포함해서 2천만 원이라고 말한 거였대요! 그리고 수습 그런 건 그냥 형식적으로 있는 이야기니 신경 쓰지 마시래요!"


신중하지 못한 2번째 취업은 이래서 문제였다.

당장 자릴 박차고 나왔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1주 치 실업급여를 받은 상황에서 그 회사에 취업했다고 신고를 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받을 실업급여도 당분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최한 K대학교 최고위 과정은 한 사람당 거의 150만 원씩 참가비를 받았다.

그가 주로 사람들을 모아 고위급 중진 정치인들에게 한 번만 축사하고 리셉션 자리 30분만 앉아 있어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모 포럼은 늘 여의도순복음교회 근처 L호텔 연회장에서 개최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자기 직원에게는 200만 원도 사기를 쳐서 아끼는 짠돌이였다.

그는 항상 자신이 진보적이며, "노회찬 선배와 친하다."라고 이야기했다.

회사 근처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한국노총 빌딩이 굳건히 세워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2달 만에 나의 선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나왔다.

그에게는 그의 욕설을 녹음했다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나에게 xx새끼, xx, x새끼, xxxx, xx, 등의...(이렇게 한 500글자 정도의 욕을 문자로 썼다. 다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발언을 다시 하실 경우 노동청에 신고하겠다고 하고, 그 회사를 나왔다.


결국 나는 첫 번째 회사도, 두 번째 회사도 실패했다.


파마머리에 안경을 쓴,

작은 일에도 자주 얼굴에 홍조를 띠며 물건을 집어던지는 붉은 돼지를 방불케 했던 대표 G야말로,

내게 교훈을 줬다.


무시당하지 않는 삶, 존중받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스펙이, 커리어가 있어야 한다고.


그로부터 약 6~7년이 지나,

공인노무사가 되고 나서 국회 보좌관이 되었을 때, 그가 의원을 만나러 의원실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의원은 그의 제안에 대해 내게 설명을 들어보라 했다. 그리고 나에게 판단을 위임했다.

그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보좌관인데, 문자로 제 번호 드릴 테니 저에게 전화 걸어서 다시 설명해 달라 했다.

그리고 뭔가 더 제안하실 것이 있으면 이 번호로 하시면 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 후 더 이상 의원실에는 그 어떠한 스팸전화와 스팸문자도 오지 않았다.

평화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그분은 여전히 분노조절 하나는 잘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정말 좁았다.

실로 몇 년 만에 지인 노무사로부터 혹시 00 회사 아냐고 질문을 받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정치 쪽 회사인데, 내가 보기엔 직장 내 괴롭힘 너무 빼박인데 노동청 진정당한 거 방어 쳐야 돼서 굉장히 골치가 아프다... 정치 쪽이라서 혹시 잘 아는지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다고 했다. 이 회사 꼴에 월 자문료는 온갖 죽는 소리 하고 더럽게 아껴서 짜증 난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에게 내가 아는 추억거리를 소환했다.

"퇴직금 포함 2천만 원이란 소리가 말이 돼? 그리고 3개월 뒤 잘릴 수 있다는 말을 아무것도 아니고 형식상 쓴 거라고 구라 치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뻔뻔하더라고. 그 계약서는 도대체 누가 자문해 준 것인지."


사실, 근로계약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계약서는 정직했다.

배반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 문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무사 일을 하면서 한 가지,

다짐해온 일이 있었다.

배신을 컨설팅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그 또한 나에게 많은 교훈을 준 은인이었다.

우리가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고 문서를 두 번 세 번 검토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약속도, 배반도, 모두 사람의 일이다.

종이는 거들뿐이다.


이쯤 되면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일"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선택도 나의 하고 싶은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단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만나게 됐을 뿐이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keyword
이전 07화바닥 밑에 지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