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애는 소득순이 아니잖아요

그 모든 긁힘은 너에게로 가는 에움길이었다.

by 유노유보

내 두 번째 연애는, 나의 월급이 가장 적을 때 시작됐다.


합격 후 나보다 어렸던 사무국장이 5명의 합격한 활동가를 대상으로 OT를 진행했다.

정말 왜인지 모르게 넓은 어깨와 적당히 큰 키, 가녀리고 긴 팔과 긴 손가락, 그리고 검은색 반팔 티와 긴 청바지를 입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한 그녀의 외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웰컴드링크(?)로 준 비타 500을 마시며 페이스북에 그녀의 이름을 남몰래 쳐봤다.

스타벅스 텀블러를 들고 빨대로 커피를 음미하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청초하다고 생각했다.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젠더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짜증과 역정 사이의 어딘가 무엇을 냈었고, 나는 당황했다.

그래서 그날 바로 "30분 늦게 퇴근하겠다"라고 하고 알라딘 당일배송으로 책을 주문해 받아 들고 나왔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을 얼른 훑은 다음에 인상 깊은 구절을 사진으로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페이스북 친구였던 그녀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좀 귀엽게 보였나 보다.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고 내게 곧잘 말을 걸어줬다.


사무국장으로서 출장을 가야 하는 날 같이 갈 사람 있는지 물어보면 내가 구실을 붙여서 같이 갈 수 있다고 했다. 따로 출장비가 지급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이 활동에 정말 진심이 아니면 굳이 그렇게 출장 가서(오후에 회의를 하고 저녁에 행사를 하는 등의 일정이 많았다.) 6시보다 더 늦게 퇴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 활동보다는 한 사람에게 진심이었다.


그러다 핑계를 만들어 우리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신촌에 볼 일이 있다고 하고 같은 버스를 타기도 했다.


시민단체 활동의 특성상 출장이나 외근이 잦은 건, 내게는 곧 자주 그녀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핑계가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서른 즈음에"라는 술집에서 레드락을 마시며 그녀와 모 정치인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내가 그에 대해 "트럼프 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열불을 내며 화를 냈다.

"샌더스면 모를까 어떻게 감히 그분을 트럼프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난 정치적 토론에 관한 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그때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이 옳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샌더스나 트럼프나

당내 비주류로 어차피 서로 비슷한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에게도 불행한 일이 닥쳤다.

나보다도 어린 그녀의 나이가 문제였을까, 사무국장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고,

그녀는 "간사"라는 직함으로 그 단체를 다녔다.

협의하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서 반복적인 실무를 해야 하는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능력과 무관한 자리이동이었다.

자신의 공익적인 뜻과 무관하게 어느 단체이든 사내 정치는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도,

어쨌든 나와 다를 바 없는 사회초년생이었다.


나도 아팠지만, 그런 만큼 그녀의 긁힘도 얼마나 아팠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저녁을 먹자고도 하고, 맥주를 마시자고도 했다.

연희동 브라운스톤 건물 너머의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걸으며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고백을 했다.

고백하려는 날, 그날 저녁부터 떨렸다.

난 사실 그때 당시 N사에서의 야근이 누적되어 디스크가 심해진 상황이었다. 허리가 아예 왼쪽으로 틀어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틀어진 허리를 좋아하는 여성에게 보여주면서 뭘 믿고 어떤 자신감으로 그렇게 고백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말을 꺼내려할 때마다 잠시 걷자고 하고 걸었다.

그래도 그녀가 좋았다. 틀어진 허리로 힘겹게 걷고 있는 것을 그녀도 알았을 텐데 그와 상관없이 무작정 30여분을 걸어 연희동 브라운스톤 아파트의 붉은색 벽돌까지 가서 앉았다. 그녀가 나의 몸 상태를 알면서도 이렇게 걷는 것은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인가? 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 고민에 빠져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내 마음은 KTX처럼 빠르게 목표를 향해 치달아가면서도 예거마이스터와 핫식스를 함께 마신 뒤 춤추고 집에 돌아가는 새벽 3시의 심장처럼 선덕선덕 거렸다.


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마그마처럼 말했다.


좋아한다고.


그녀는 곤란하다는 표정과 흥미롭다는 표정의 그 어딘가의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0여 초가 지났을까. 그녀는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1주일만 기다려줄래요? 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다음에 대답을 해도 될까요?"


그녀는 단체에 염증을 느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느덧 중대결심을 위해 우선 가족끼리 휴가를 보내기로 한 상황이었다.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 이후, 약속의 1주일이 지났다.

6일째 되는 날, 그때 같이 친하게 지낸 친구의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면서 연애상담을 했다.

"50대 50"이라고 했다. 그가 연애를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을지언정, 어쨌든 50퍼센트의 "된다"는 가능성에 내 마음은 계속해서 쿵쾅됐다.


약속한 날이 됐다.

저녁 8시가 되도록 그녀는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8시 21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 삐 -"

수신거부였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게 연애상담을 해준 친구에게 따졌다.

"야! 50대 50이라며!"

"음... 그런데 이제 객관적으로 보면 이건 안될 가능성이 90퍼센트 아니냐? 이게 되면 진짜 우주에 특이점이 오는 거야."


등의 말을 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 밤 9시가 되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짧은 인사치레가 끝나고, 본론을 물어봤다.

"생각... 해봤어요?"

"(살짝 웃으며)... 우리 오늘부터 1일 해요."


!


네?!


놀랐다.


"아니 그럼 왜 저를 수신거부하셨던 거예요...?"

"아 그건... 제가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느라..."


그 순간,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유언이 떠올랐다.


"...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 인생은 아름다워!"


엉뚱하고 어이없었지만,

내 친구의 말대로라면

"우주의 특이점"이 오고야 말았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기 위해 대기업에 취업하려 했고,

그 어느 누군들 연애를 하려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와 같은 노예생활을 견뎠지만,

나의 두 번째 연애는 결국 내 사회생활 중 가장 적은 소득을 벌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채용을 반대한 사무국장은 그렇게 내 인생의 두 번째 여자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W는 바로 나와 함께 우리들의 "긁힘"이 커리어로 변하는 순간순간을 함께 공유한,

바로 지금의 내 아내다.


(참고로 수신거부까지 해가며 보려 했던 그 드라마 제목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신혜선 나오는 것만 기억난다고.)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그렇게 1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사실 내 감정을 이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고,

(W의 워딩을 그대로 옮기면, "너무 도저히 못 알아챌 수가 없을 만큼 이 사람 참 순수하다 싶을 정도로 티가 많이 났다.")

막 엄청 스파크 튈 만큼의 확 끌리는 건 없었지만,

왠지 연애하면 못 헤어지고 결혼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 더 많은 남성을 만나고 연애도 더 많이 하고 싶었다.

그게 그녀에게 1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리처드 파인만의 <역사총합이론>은

입자가 특정 지점에 도달할 가능한 모든 확률과 경로를 모두 합친 "역사의 합"을 계산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내 인생의 그 모든 긁힘 들은 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위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그 모든 긁힘의 역사의 "합"은 지금의 내 아내 W를 만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만남은 나의 모든 긁힘을 내 커리어의 동력으로 바꾼 스위치였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keyword
이전 09화벼랑 끝에서 만난, 나를 반대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