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힘은 커리어의 연료였다.
W는 LEET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서울대 로스쿨을 쓰기엔 아슬아슬한 점수였다.
아침 8시 59분부터 나는 분주했다.
W는 차마 모니터를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대신 그녀의 수험번호와 성명을 입력했다.
9시 1분. W는 여전히 화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대신 Enter를 눌렀다.
이윽고 두 글자가 내 동공에 반사됐다.
"합격"
헛웃음만 나오던 퇴근길의 상처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스쳤다.
그 기억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다.
우리를 여기까지 밀어 올린 강력한 연료였다.
내게 허구한 날 욕설을 퍼붓던 상사의 목소리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항상 내 마음속의 엔진을 켜두게 만든 고급 휘발유였다.
W는 시민단체를 나온 후, 긴 대화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여기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보다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더 힘이 세. 나, 로스쿨 갈래."
사법고시의 오랜 실패와 시민단체에서의 무력감.
그 긴 터널의 출구로 그녀는 '라이선스', '타이틀'을 정조준했다.
그녀의 그 한마디가 내게도 길을 보여주었다.
'내가 만약 노무사였다면, 그렇게 당하고만 살았을까?'
주장의 시시비비보다 "누가 말하는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겪은 세상은, 소위 진보 운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것이 더 심했다.
우리에겐 우리 주장의 '기반'이 필요했다. 우리 둘의 다음 전장은 명확해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장 그녀의 수입이 끊긴다. 우리 둘 다 집안의 지원을 기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지점에서 내 선택지도 정해졌다. 직장병행 공인노무사 수험생.
그런 선택의 결론이 나를 서울시의 노동 관련 민간위탁기관으로 이끌었다.
그 어떤 정치적 성향보다도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거푸 실패했던 "직장생활", 이 직장이란 조직에서의 노동이란 것에서 나의 정당함, 나의 권익을 넘어 타인의 권리까지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료노동상담과 청소년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교육을 하는
법률팀의 공인노무사들을 보았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지나쳐온 회사나 조직에서,
내가 만약 변호사였다면,
또는 공인노무사였다면,
어찌 되었든 간에 전문직이라고 할만한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더라면,
내가 그렇게 당하고 살았을까.
나는 새 직장으로 출근했고, 그녀는 LEET(법학적성시험) 강의를 들었다.
둘 다 정신없이 바빴다.
새벽 5시 40분 알람, 지하철 11 정거장, 점심 32분, 민법 총칙, 채권 총칙, 채권 각칙 공부...
그리고 밤 11시 40분쯤에 취침.
정신없이 두 달이 지났다.
힘들었지만, 나는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짜증 나서 다 집어치우고 잠들고 싶을 때마다 N사를 생각하고 그때 억지로 깔았던 모바일 게임들을 생각했고 민법 채권 총칙이 너무 어려워서 머리에 쥐가 날 때마다 "###, ##새끼, 멍청한 새끼, 머리 좀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만 순 머저리..." 등등... 내게 허구한 날 욕지거리를 날렸던, 그렇지만 고객에겐 분노조절 잘해였던 정치컨설팅 회사 대표 G를 생각했다.
긁힘의 힘은 위대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노무사 1차에 합격했다. 수험생들이 말하는 '개미지옥'의 입구에 선 줄도 모르고.
2차 시험장에서 내가 얻은 건, 시험용 법전과 "이건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라는 값비싼 경험뿐이었다.
노무사 수험생들은 익히 아는 "개미지옥"의 시작이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 난이도의 갭이 현격하게 차이나는 걸 초반에는 잘 모른다.
그래서 1차 시험을 1~2달 만에 붙은 사람들은 "오 뭐야 쉽잖아!"라고 자신 있게 2차 시험을 접근한다.
그리고 시험 당일에서야 확인하는 것이다.
LEET 성적발표 후, 원서 접수 직전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서울대 포기를 조심스레 권유했다.
내 조심스러운 제안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나, 고3 때도 재수할까 봐 서울대 못 썼어. 돌이켜보면 나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던 거 같아. 실패할까 봐. 근데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아. 자기랑 같이 있으니까 그래도 왠지 용기가 나네. 이번에는 한 번 내가 정말로 원하는 곳을 써볼래. 떨어지더라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아."
그녀의 용기에 나는 Y대와 서울대를 함께 쓰자고 마지막 조언을 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 당일.
나는 뛸 듯이 소리 지르며 기뻐했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다 이내 같이 소리 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낸 학교는 어디인가?"
"연세대입니다"
시중의 유머(?)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도 얼른 노무사 시험을 붙고 그녀의 변시 공부를 지원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그로부터 3년이나 더 지난 후에야
그녀의 변호사 시험 합격과 나의 합격이 겹칠줄은.
그리고 그때는 내게 시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건 내 못다 한 체불임금을 다 받아내고 더 나아가 나의 구겨진 자존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