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전거 탄 달팽이 May 16. 2022

정수기 소리가 들렸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가위에 자주 눌렸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거 같다. 하루가 멀다고 가위에 눌렸는데, 그땐 가위에 눌리고 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혼자 잠들기 힘들어했고, 부모님의 잠을 깨워가며, 함께 자기를 요구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가위를 많이 눌리던 그때, 수많은 가위눌림 중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때가 있었다. 거실에 누워 자는 내가 보이면서 가위에 눌리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진심이네 집이래.”라며 깔깔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그러면서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다.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마치 유체 이탈이라도 한 듯, 내가 누워 있는 거실 풍경이 보이며 가위눌리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유독 기억에 남는 가위눌림은 모두 그렇게 소리가 강렬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소리와 함께 가위눌리는 날은 어쩐지 더 찝찝하고 기분이 나빴고, 힘들었던 거 같다.


   최근에 또 시간표를 바꿔야 했다. 일과 시정표가 변동되는 상황에서 시간표를 바꿔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졌다. 부장님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수용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강사분은 시급과 관련된 예민한 문제가 발생해, 그 부분을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참 힘들었다.


   어찌어찌 시간표까지 허락이 떨어지고 잘 넘어가나 했는데, 외국인 아이 하나가 교실에서 자해를 했다. 한국어 학급에 오는 친구는 아니지만, 한국어 학급 학생과 관련한 사안도 불거져서 그 부분을 처리해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무리였던 걸까.


   그날은 들어가고 싶었던 수업도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가위에 눌리기 시작했다. 바깥에선 정수기 버튼을 누르고 물을 따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래도 남편이 집에 있구나 싶어, 안간힘을 써서 남편을 불렀다. 아이들이 자다가 깰 정도였다.


   아무리 불러도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오질 않았다. 바깥에서 인기척은 나는데 남편은 들어오지를 않는다. 이 인간이 뭘 하느라 못 듣나 싶어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다.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나? 교회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깥에서 들린 소리는 뭐지. 분명히 우리 집 정수기 소리였는데. 물 따르는 소리도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들으며 가위에 눌렸는데. 남편은 교회란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보니 정말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그 몇십 년 전처럼 또 소리를 들으며 가위에 눌렸었나 보다. 다만, 그때는 가위눌림에서 풀리고 나서도 실체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해 두려워했다면 이젠 그렇지 않았다.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아직도 그날의 정수기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때의 기분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5월이 되면 안정이 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헤매는가 보다. 코로나 후유증도 미세하게 남아 있고, 책임져야 할 부분은 많고, 생각보다 능력이 부족한가 보다.


   어쩌면 나는 나의 힘만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것을 내어놓고 나의 부족함을 그분 앞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치고 곤한 것일지도. 나의 한없이 부족하고 약한 힘이 아닌, 오롯이 그분께 의지하는 내가 되기를 기도해야겠다.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정수기 소리를 떨쳐버리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의 나, 힘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