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끼_소고기 뭇국
2020년 11월 10일, 오후 9시 15분
아직 몸은 주말에 머물러있는지 도통 평일의 삶에 적응하기 힘들다. 침대에서 도통 벗어나지를 못해 동생이 커피를 타 주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한 잔으로도 모자라 컵라면을 먹으며 커피 한 잔을 더 타 와 마셨다. 카페인을 여러 번 주입해도 깨지 않는 몸이 야속했다.
급할수록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뭘까. 택시를 타게 될 줄 알면서도 준비하는 손길이 느렸다. 다시 한없이 택시를 타고 싶은, 그니까 출근을 조금 더 늦추고 싶은 시기가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지 않은 것. 비슷한 듯 다른 이 네 가지 일들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때로 분류를 잘못하게 된다. 가령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든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계속하고 싶은 일이라든지. 그리고 고뇌는 이 어긋난 분류에서 시작된다.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문제는 내가 이 이들을 할 수 없는 일에 넣어뒀다는 것. 해보면 다를 수도 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귀찮음이라는 이름을 붙여 미루고 있는데, 사실 그 안에 숨은 건 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문제다.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겠지만.
직업의 특성상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기로에 나도 서있다. 네 가지 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게 안심이 되면서도 안타깝다. 조금 더 그 선이 선명해지면, 세상의 고민이 절반쯤 사라질 텐데.
저녁 메뉴는 엄마가 끓여준 소고기 뭇국. 여기에 엄마가 새로 생긴 곳에서 샀는데 영 맛이 없다는 삼겹살과, 나는 맛있기만 했지만 엄마 말로 좀 짜게 무쳐졌다는 콩나물 무침이 잔뜩 들어간 비빔밥이 더해졌다. 이 중 제일 먼저 비운 건 소고기 뭇국이다.
맑고 감칠맛 도는 국물과 섞여 들어가는 부드럽게 부서지는 무가 짜고 매운 비빔밥의 맛을 지운다. 퍽퍽한 식감을 좋아하는 나조차 버거운 지나치게 버석한 삼겹살의 거친 맛도 지운다. 오늘의 나를 고민하게 했던 잘못된 분류의 선도 지워버린다. 얼죽아인 나를 녹이는 보드라운 따뜻함이다. 중간중간 씹히는 소고기 조각조차 부드럽다.
결국 오늘의 나는 택시를 탔고, 퇴근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맥주가 내려가며 긁는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내가 잘못 분류한 것들에 대한 힐난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위안을 얻고 싶었는데 오히려 생각이 많아진다. 아까 전 내가 삼킨 따뜻함을 떠올린다. 설령 잘못 넣었어도, 그냥 선을 녹여버리면 되지 않을까. 지난 시간 못 할 것 같아, 묻어둔 것들을 다시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