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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마지막 같은 시작

과거의 한 끼_소고기 버터 감자 카레

by 여느진

2019년 12월 1일, 오후 8시 30분


12월이 시작됐다. 12월의 시작은 어쩐지 마지막 같은 느낌을 풍긴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서둘러 마무리하라는 신호 같기도 하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오늘은 솔직히 힘든 날이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매일매일 그 날의 힘듦이 있었고, 간간히 숨어있는 즐거움의 발견이 곧 좋은 하루로 귀결되어왔다.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육체적인 피로면 잠을 자고 나면 해결될 텐데, 정신적인 피로도가 드디어 한계치에 도달했다.


지금 직장 이전에 일했던 곳이 생각났다. 지금 직장의 체계가 온전히 바뀔 예정이고, 나는 그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인데 묘한 기시감이 떠올랐다. 다시 말하면 엄청 스트레스받았다. 곧 동생은 내가 보내다 끊긴 메시지를 보고 상황을 눈치챘는지 엄마에게 알리고 치킨 기프티콘을 보냈고, 엄마는 맥주를 사고 삼겹살을 구웠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캔맥주는 가족의 위로가 담겼다. 이 위로를 넘길 힘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12월 1일에 나는 카레를 두 번 먹었다. 지금은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지만, 카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사실 점심에 카레를 이미 먹은 상태에서 저녁에도 카레를 먹으려니 고민됐지만, 막상 먹을 땐 즐거웠다. 이때 나와 카레를 먹은 사람도 엄마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가보고 싶은 음식점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곳이 카레집이었을 때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었는데.


영화는 재밌었고, 카레는 맛있었다. 토마 토향이 섞여 나던 카레는 소고기의 부러움과 잘 어울렸다. 조금 퍼석했던 버터 감자를 중간중간 카레에 찍어먹기도 하고, 난을 찢어 찍어먹기도 했다. 고소함과 향신료가 섞여 맛있었다. 엄마의 카레가 더 맛있어 보였지만 꾹 참고 먹었다.


작년의 오늘은 즐거웠다. 낮에는 지금은 헤어졌지만, 당시의 연인과 아직도 마지막 대사가 생각나는 영화를 보고서 마늘 후레이크가 잔뜩 들어간 카레를 먹었고, 저녁에는 엄마와 데이트 후 카레를 먹었다. 당시엔 난감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점심과 저녁을 모두 좋아하는 음식으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채웠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억지로 속에 있는 불을 맥주로 끄고 있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기억하는 작년의 12월은 꽤 충만했는데,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불도 있었겠지. 어쨌든 지금은 카레가 너무 먹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만 내 하루를 채우고 싶다. 엄마의 위로가 아닌 기쁨이 담긴 맥주를 마시고 싶다. 내일은 조금 다를까 기대하고 싶다. 아직은 끝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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