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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익숙해서 고마워

오늘의 한 끼_오이소박이

by 여느진

2020년 10월 14일, 오후 12시 39분


일찍 떠진 눈.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아 어제 새벽에 하다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이어갔다. 휴무인 엄마가 쥐어준 커피가 아니었다면 진작 다시 감겼을 눈. 카페인을 강제 주입해 의식을 깨운 내 눈에 들어찬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노트북 속 활자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외국의 언어들. 머리가 어질 하다.


잠시 방 밖으로 나가니 엄마도 분주하다. 내게 뭐라도 먹이겠다고 계란말이와 오이소박이를 뚝딱 해낸다. 덕분에 어제보다 풍족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사실 밖에서 오이소박이를 잘 먹지 않는다. 지나치게 짜거나 지나치게 단단하거나. 이상하게 엄마가 해준 오이소박이가 아니면 그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엄마표 오이소박이에 내가 너무 익숙해져 아예 기준이 되어버려서일 수도 있고.


하얀 밥을 한 입 크게 퍼먹고 짭조름하고 매콤한 오이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으면 최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오이보다 양념을 더 많이 쥐고 있는 채 썬 양파만 얹어먹어도 최고다. 계란말이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이소박이만 입에 넣기도 하고. 마침내 영양제를 먹고서 마무리된 오늘의 첫 끼가 흐물 하고 아삭하다. 이 맛이 익숙해서 다행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계속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 있는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일찍 어른이 됐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이렇다 보니 별다른 지원 없이 혼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일상의 당연함을 문득 자각할 때면 이렇게 당연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선 깨닫곤 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당연한 기준들은 처음부터 익숙했던 게 아니라는 걸. 이 익숙함이 당연한 기준이 되기까지 먹어온 오이소박이들은 결코 내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니까.


엄마와 소공녀 같은 예전의 명화 애니메이션을 보며 줄거리가 이랬나 저랬나 한담을 나누다 식사가 마무리됐다. 그 후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나갈 준비를 하기 직전까지 붙어있었지만, 든든한 배 덕분인가 출근하는 발걸음이 처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으로 동생과 먹기로 한 삼겹살을 위해 어떤 맥주를 사 갈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바쁘고 지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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