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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엘리 Jan 25. 2023

연필 깎는 소리

잊고 살았던 기쁨 + 1

“전화도 자주 안 하는 딸내미야.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었니?

생일 선물로 계좌에 용돈 조금 넣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림 같은 거, 그려보고 싶다고 했잖아. ”

 

엄마 말씀처럼 태평양 건너 남반구 멀고 먼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화도 자주 안 하는 애교도 없이 무심한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하셨다. 일흔이 넘은 엄마는 마흔이 넘은 딸이 부모님 보시기에 정년이 보장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남의 나라에서 외롭게 사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매달 한 번은 꼭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다달이 용돈을 조금씩 주시는데, 생일이 있는 달에는 특별히 더 많이 주신다. 내가 우리나라에 있는 은행 계좌의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쌓아만 두는 것을 아셔도 그렇다.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수만 가지 방법 중 하나이다.




초등학생 시절에 학교의 방과 후 교실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때는 지금처럼 일정 수업료를 지불하고 원하는 사람이 참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담당 교사가 각종 미술 대회에 참가시켜 입상을 할 만큼 잘 그리는 아이들을 몇 명 골라 조금씩 지도해 주면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게끔 하는 것이 미술반의 목적이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바로는 학생이 큰 상을 타면, 지도 교사도 승진에 도움이 될만한 상을 탄다.) 미술반의 목적을 알리 없는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 나는 늘 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집에 가는 대신 미술반에 간다길래, 친구를 따라 미술반에 갔다. 그렇게, 처음 보는 선생님께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고, 그렇게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나면 미술반으로 갔다. 물감으로 색을 칠하며 나무를 그리고 꽃을 그리고, 사람을 그렸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즐거웠던 시간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 6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께 뽑혀서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은 이런저런 핑계와 사정으로 하나 둘 미술반에서 빠져나갔다. 미술반에는 크레파스화를 그리던 민경이와 수채화를 그리던 나만 남게 되었다. 선생님으로서는 잘 그리던 아이들이 다 빠지고 어부지리로 들어온 아이만 남아 난감했을 것 같다. 선생님의 속 사정까지는 헤아릴 수 없었던 어린 나는 다행히 선생님께서 그려준 예시들과 연습했던 그림들로 시대회나 도대회에서 꾸준히 입상을 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매일 그리라는 대로 그려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그림대회에서 받은 상장 몇 장을 놓고 내가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린다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같이 그림을 그렸던 민경이가 서울에 있는 예술 중학교로 진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나도 얼마든지 민경이처럼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 민경이는 예중에 간데. 내가 민경이보다 미술 대회 나가서 상도 더 많이 탔는데. 나도 미술학원 다니면서, 계속 그림 배우면 안 돼?”

“아빠 오시면 아빠랑 상의해 보자.”


아빠는 나의 재능이 예술가로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계셨다.


“우리 딸은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데, 미술은 나중에 얼마든지 취미로 하거나,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거란다. 카이스트에 디자인과 이야기는 들어봤니? “ (후략)


공부를 잘한다는 칭찬과 아빠의 논리적인 설득에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그림의 꿈을 묻어버렸다. 팔레트도 물감과 붓, 이젤도 다락방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거의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엄마로부터 ‘그림을 배워보라.‘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조카들에게 지나는 말로 ’ 고모는 그림도 엄청 잘 그렸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봤어도, 나에게 그림을 배워보라고 권유하신 것은 처음이다. 엄마는 그 때의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사셨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엄마께는 한 번도 제대로 고하지 못했던 나의 외로움을 엄마는 보지 않고도 들여다보고 계신 것만 같다. 말도 없이 혼자 사부작사부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마치 다 알고 계신 것만 같다.


혼자서 인터넷을 보고 가끔 그림을 끄적인 지 이제 딱 1년이 되었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2023년 새해가 되면서 온라인 1:1 그림 수업을 시작했다.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그림 수업을 등록한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선 연습부터 시작한다. 어떤 선이 예쁜 선인지, 어떻게 그려야 더 예쁜 모양이 되는지 배운다. 수업을 준비하며, 과제를 시작하며 커터칼로 연필을 깎는다. 연필을 깍는 손도 신난다. 사각사각 연필을 깍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 기쁜 소리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 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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