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없이 혼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수가 없어요.
디자인을 잘하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1인 스튜디오로서 디자인 에이전시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디자이너를 만나게 된다. 디자인 PL(Project Leader)을 담당하며 후배 디자이너들과 일을 하다 보면 '사수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내가 만나는 디자이너들은 출신 학교, 회사, 연차, 환경이 모두 다르다. 세상에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이너, 드로잉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디자이너,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서 선배나 동료 없이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게 되는 과정은 디자이너의 수만큼 다양하고 그만큼 처한 상황과 주어진 조건, 갖추고 있는 역량도 제각각이다.
사실 제대로 된 사수가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멘토의 부재'는 디자이너에게만 해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존경할만한 상사에게 체계적으로 트레이닝을 받으며 성장하는 일은 어쩌면 TV 속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사수는커녕 내가 고생했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심보의 상사를 만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면 사수가 없어도 혼자서 남달리 성장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급에서 중급으로, 중급에서 고급으로, 그리고 고급을 넘어 탁월한 성과를 내는 전문가로 성장하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해내는 이들은 대체 나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타고난 지능과 재능이 있기 때문일까? 내가 모르는 유능한 멘토가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사수 없이 각개전투하며 전쟁터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는 걸까? 도대체 멘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회사가 학교가 아닌 것은 저도 이미 알거든요
"회사는 학교가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걸 왜 너에게 알려줘야 하지?"
신입사원 시절 팀장님이 나에게 한 말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까마득한 선배님의 이 한마디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질문을 하면 답을 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에 인색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어렵게 배운걸 남이 쉽게 가져가는 것이 아까워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밥그릇을 뺏길까 불안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함께 일하는 선배나 상사가 반드시 '내 사수'인 것은 아니다. 일을 잘 하지만 알려주는데 인색한 사람일 수도 있고, 너무 바빠서 알려줄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경력만 많고 일은 못해서 알려줄 깜냥이 안 될 수도 있다. 알려준 노하우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알려준 것이 내 지금 수준에서 받아들이기에 벅찬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는 것이다.
회사가 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도 안다. 하지만 함께 잘하게 되면 그만큼 서로 일하기가 수월해지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는 것을 나눔으로써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과제를 함께 해결하며 성장할 수 있는데, 구태여 비효율적인 주먹구구식의 일처리를 대물림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항상 나의 일을 잘하고 싶었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상상해왔다. 그래서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디자인을 잘하게 되면 내가 아는 것을 사람들한테 기꺼이 알려줄 거야.'라고.
사수 없이 혼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혼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디자인이 늘지않아 방황하던 시기를 통과하며 가슴 속에 항상 품어왔던 테마다. 그래서 초보자가 전문가로 성장하는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서 책을 읽어 왔다.
읽고, 생각하고, 일에 적용하는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단순히 오래 일한다고 전문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며,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실력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다 보면 늘겠지라는 생각은 마치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을 보자. 10년 차, 20년 차 초보자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나에게는 멘토가 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멘토가 있다. 10여년 전부터 언제나 곁에서 나를 이끌어 준 사람. 그는 바로 스펜서 존슨의 책 <멘토>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피아 선생님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신입사원 1년 차인 200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데 오랜 세월 내 책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책이 나에게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피아 선생님이 내게 중요한 멘토인 이유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가르친다'는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지난 세월 한 권의 책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아왔는지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일을 처음 시작하던 시점에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특정 시기에 특정한 메시지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소피아 선생님은 말한다.
"각자 자신의 행복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까?"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훌륭한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회사에서는 상사가 나를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행복,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은 어쩐지 두렵고도 막연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태도라는 것을 배웠다.
한편 '사수 없이 혼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소피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쳐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후 내 삶에서 하나의 거대한 테마가 됐다. 하지만 200페이지의 얇은 책 속에서 소피아 선생님은 세부적인 방법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을 알고 싶었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후로 오랜 세월 여러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했다. 이제 조금은 그 답을 찾은 것 같아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정리해 보았다.
전문가의 제1조건, 태도(Mindset)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제1조건은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책임지는 '태도(Mindset)'다. 이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모니터링하는 능력이다. 자신의 특징, 장점, 단점, 능력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한정된 자원인 시간과 노력을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부분에 효율적으로 투자하는 능력이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상호 교정해 나간다. 우리 모두는 학생인 동시에 스승이라는 소피아 선생님의 말을 나는 아래 그림처럼 정의했다.
메타인지를 통해 ‘현재의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한 '미래의 나'를 설정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이 스스로를 가르치는 '셀프 멘토링(Self Mentoring)'이다. 현재의 나는 학생이고 미래의 나는 선생(멘토)이다. 두 개의 자아는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쫓아가고,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성장한 만큼 정교해진다.
미래의 나, 즉 멘토는 전문가로서 완성된 내 모습이다. 초보자 시기에는 멘토를 설정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얼기설기로라도 가안을 잡는다. 초기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막연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해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탐색하는 일정 시기를 보내야 한다. 멘토의 모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성장함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정교화된다.
자기 자신을 디자인(Design)한다
경험도 지식도 너무나 부족했던 시기에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막연하게 아래 그림처럼 생각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트렌드를 잘 알고, 포토샵을 잘하고, 열정이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라고 거칠고 두루뭉술하게 생각한 것이다.
경험이 쌓이고 조금씩 성장하면서 내 안의 멘토는 점점 구체적으로 정교화되어갔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잘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인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초에 구상했던 요소들을 스스로에게 가르쳐, 어느 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하게 되는 시점이 되면 나에게 부족한 또 다른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각각의 요소들은 씨앗이 뿌리내려 자라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무들은 세부 줄기들을 뻗어가면서 점차 무성해진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의 내 멘토는 한층 정교해졌다.
내 미래의 모습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고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차근차근 갖춰나간다. 사람마다 정의하는 요소들이 다를 것이고 특별히 집중해서 강화시키고 싶은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개성이자 차별성이다.
처음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단순히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소피아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는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는 함께 성장하고, 과거의 멘토는 미래의 멘토의 일부가 된다. 내 안의 멘토를 설계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디자인한다는 말과 같다.
앞으로 풀어나갈 성장에 관한 이야기들
사수 없이 혼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매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는 짧은 시간에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나처럼 외롭고 힘겹게 성장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성공이 아닌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지금 쓰고 있는 이 한 편의 글에 미처 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차차 공유하려고 한다. 아서 프랭크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비록 지극히 개인적인 내 얘기를 할 뿐이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쳐 쓰기'를 하며 자기 성장을 위한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내 안의 멘토인 '영감을 주는 사람'에게 한발짝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때때로 10대의 나, 20대의 나, 30대의 나, 이 세 명이 모여 있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들은 너무 다르면서 또한 너무 비슷하다. 시간을 초월해 여러 명의 내가 이야기하는 모습은 즐겁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며, 때로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에게 묻는다. “어때? 상상했던 모습이랑 비슷하니?” 서로에게 제법 기특하다는 칭찬을 하는 중에 또 한 명의 멘토인 40대의 내가 참석한다. 미래의 나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녀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모두가 각자의 멘토를 만나 성장할 수 있기를.
멘토는, 내 안에 있다.
참고 도서 : 스펜서 존슨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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