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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Sep 25. 2015

팽목항에서_인간의 존엄성은?

잔인함이 존엄성을 삼켜 버린 현장

팽목항에서_인간의 존엄성은?

잔인함이 존엄성을 삼켜 버린 현장


2015-09-24(목) 팽목항을 찾았습니다.화순공공도서관에서 강연기회가 있어서 목포를 거쳐 진도항을 방문했습니다. 2014-04-16(수) 팽목항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이제는 찾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나는 2009-01-20(화) 새벽녘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의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집단으로 농성하던 철거민들이 화염 속에 사라져갈 때 인간의 존엄성도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때 블로그에 오늘과 같은 심정으로 짤막한 글을 썼습니다. 팽목항은 또 다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썼던 글을 조금 수정하여 올립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로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의 실존과 영혼에 대해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것을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정신적 토대도, 방법도, 수단도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인간 존엄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 근거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생각해보자.


2015-09-24 정오무렵의 팽목항...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독일의 기본법 제1조 1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이다.(Die Würde des Menschen ist unantastbar. Sie zu achten und zu schützen ist Verpflichtung aller staatlichen Gewalt.)


나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고 법과 상관없이 평생을 살아 왔기 때문에, 헌법의 인간 존엄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용산 사태(2009년)와 세월호 사건(2014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인간 존엄의 신성불가침성(Unantastbarkeit)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권력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이것은 모든 하위법률의 존재 목적을 지배하는 최고의 헌법적 정신이다.


이러한 헌법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헌법(constitution)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래서 서양사상사의 일단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사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종교적 사유, 즉 기독교적 사유인 신학에 뿌리를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사유인 철학으로부터 나온다.


첫째, 인간의 존엄성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인간 존엄의 근거를 명확하게 해 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이마고 데이(Imago Dei) 학설(神人同形說)에 따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은 고유한 가치를 갖게 되며, 이것이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는 특징이다. 인간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일한 형상을 갖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질서는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의 믿음에 근거한 인간 존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에도 인간 존엄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둘째, 세속적 사유인 철학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다음과 같은 사유에 의존한다.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은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Der Mensch als "Zweck an sich" darf nie nur "Mittel zum Zweck" sein.)


이러한 칸트의 경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형식화되었다. 즉, “너는 너의 행위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말씀과 유사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인간의 도덕적 자기결정 능력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삼라만상과 달리, 자기입법(自己立法)에 복종하면서 동시에 보편입법(普遍立法)에 복종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한다.


칸트의 사유를 조금 더 쉽게 풀어 보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가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나서 다른 사람에게 주먹으로 한대 후려쳤을 때, 그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주먹을 날려 내가 얻어 맞아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자기 목적을 설정하는 유일한 생명체다. 타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나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이 자율성(Automomie)이 바로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내가 여러 강의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해 왔던 실존적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훼손되는가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과 그 근거를 아무리 외쳐 봤자 아무도 그것을 존중하거나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존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 극단적으로 말살되는 극한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인간 존엄이 말살되는 상황을 수없이 겪었다. 모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상상하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이유는 그 속에서 어떤 자율성도 확보되지 못한 채 타율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 유학시절 뮌헨의 북쪽 마을 다카우(Dachau)에 있던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가 보았다. 독일 정부는 잔인했던 고문기구와 생체실험장면, 그리고 가스실과 화장터를 비롯한 수용소 전체를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해 놓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1980년대 처음으로 수용소에 갔을 때는 입구에 어린이와 노약자는 가급적 관람을 삼가라는 경고도 있었다. 참혹한 장면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2011년 여름휴가로 독일을 여행할 때, 다시 보니 그런 경고문이 없어졌고 박물관은 비교적 온건하게 정비되었다.)


인간 존엄이 말살되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외려 우리는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언제 다시 그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그 어떤 징후도 미리부터 싹을 잘라야 한다.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큰 재앙으로 몰려오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멀리 히틀러 정권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인간의 존엄을 경시했던 세계의 모든 정권이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정권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시민들도 비참했다. 가까이 한국 현대사도 그랬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인간의 존엄을 경시했던 대표적인 권력자들이었다. 당시 시민들의 삶은 공포스러웠고 그 권력자들의 종말은 비참했다.


그런데 이들 권력자에게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Mensch als “Zweck an sich“)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Mensch als “Mittel zum Zweck“)으로 본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또는 권력자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용산 사태와 세월호 참사는 도덕성이 결여된 정부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생생한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자율성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건물 옥상에 올라가 시위하는 실존적 인간들을 향하여 그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진압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구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상황에서 선장과 선원들, 해경, 해수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고위층이 학생들과 승객들을 구조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세월호가 침몰하도록 방치한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수많은 동영상과 언론보도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언론에 보도된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용산이든 팽목항이든 인간의 잔인함이 인간의 존엄성을 삼켜버린 현장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어야 한다.



갤러리

(이 사진은 팽목항에서 2015년09월24일 12시경에 찍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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