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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Jan 25. 2021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 문학동네

왜 이 소설을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과 함께 묶어두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내 마음에 작은 동요를 일으켜서 내 감정을 돌아보게 해서일까. 왜 책꽂이에 꽂아있는 여러 한국 소설 중에 이 두 책을 선정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골라놓고는 모르겠다는 말이 바보 같지만, 그래서인가 보다 바보 같은 마음을 심어주는 이 두 소설이 어딘지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알게 되는 것이 정말일까. 돌아보고 문득 그때 그 선택, 그 결정이 잘못이구나 싶지만 앞으로의 시간이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그냥 막연함 그 자체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우리에게 소설은 '자 봐봐,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재미있니? 그렇다면 너는, 너 인생은 재미있니?'라고 말해준다. -가끔 재미있다. 소설, 영화, 음악이 있다면... 아니 좀 더 자주 재밌다-


독자인 나는 재미있다. 아 이 인물의 비극이 가슴에 꽂히더라도 그 아픔조차 재미로 스며들어서 끝까지 읽게 된다. 그리고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 인물을 보고, 따라가면서도 막상 내 인생은 고칠 수 없는 바보. 하지만 그래서 소설은 많고도 많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간에, 그때그때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소설을 또 읽는다. 그러면 '경애의 마음'이 혹은 '일곱 해의 마지막'이 손에 잡히는 것이다.


책은, 소설은 신기하게도 독자인 내 마음의 요동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이 바뀌고는 한다. 처음 읽었을 때 눈에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문장이 쑥쑥 자라서 내 눈높이에 맞춰진다. 그럴 때는 이 소설이 이런 이야기였나 싶게 낯설기도 하고 그래서 빠져드는 것이다. '경애의 마음' 도 '일곱 해의 마지막도 두 번을 읽은 소설인데 하나는 더 속속들이 읽었고, 하나는 처음보다 무덤덤이 읽었다. 여전히 그러나 두 소설은 어딘지 닮아있다. 위로를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실패를 안고 사는 현대인과 실패를 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시인의 이야기는 2021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울림을 선사했다.


소설은 어떤 경우에 충격을 주기도 하고, 호기심을 심어주기도 하고, 흥미를 돋우기도 하고, 찡한 울림을 주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지 나는 좋다. 소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속에 글자로 심어진 이미지이다. 그건 영화로 보는 것과 또 다르다. 영화는 훨씬 흡수가 빠르고 내가 바꾸지 못하는 고집스러움이 있다. 그래서 매혹이 되기도 하지만, 소설은 내가 그려내는 이미지로 기억되기에 이렇게 리뷰를 써서 이미지를 다시 내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처음 썼던 리뷰에서처럼 상허, 기행, 병도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 후의 이야기랄까 그것이 내게 많은 울림을 준다. 분명 독재 사회에서 숙청을 당하고 말지만, 다들 다시 인간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셋을 보며 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허는 내리는 눈에 덮여서 곧 사라질 것처럼 기행 앞에 있다. 그는 술 한잔이나 마시자고 기행에게 말을 걸지만 당시 기행도 다른 이들도 숙청당한 상허를 바이러스처럼 피하기 일쑤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상허는 눈 내리는 길가에서 그저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상허의 얼굴과 제스처는 기행에게도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메시지 같다. 그건 어딘지모를 인간미이다. 인간미라 하면 꼭 누군가를 돕는 미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날 상허는 북한 독재 사회를 이미 넘어선 원래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추억에 젖은 상허는 잘못 단추를 끼우고 옷을 입은 것처럼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가 조금 실성한 것 같은 그 모습과 대화가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기행은 또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시를 읊는 여성 동무 앞에서 울컥한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재빨리 자신은 그런 시인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며 물러나지만 자신의 시를 아름답게 암송하는 그 순간 다시 원래의 시인의 마음을 되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몸이 울컥하며 반응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잘 포착하는 작가 '김연수'는 백석 시인을 너무나도 잘 그려놓았다. 조금 지쳐 보이지만, 조금 힘을 내는 그런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백석은 매주 그 여성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써오는 동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과 몸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또 있었을까. 아마 절망과 고통을 헤매다가 괴로운 마음만 되풀이했을 것이다.


병도 역시 그러하다. 숙청당하고 나서야 고백하는 편지를 기행에게 보낸 병도. 그 편지를 쓰며 마음의 빗장을 그제야 열었겠지. 다들 병도에게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그도 사람 아닌가. 그래서 병도에게도 변명이 있을 테고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기행은 병도의 편지를 다 읽지 않았다고 소설에서 밝히고 있지만 추억을 밝게 지피는 불씨를 기행에게 주지 않았는가.


아무리 독 사회에서 시인이 된 들, 함께 부대끼며 위로를 건네는 문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가시방석일 것이다.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아니 생명력이 하나도 없는 문장 따위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셋은 다시 가까운 사람들이 된 거 아닐까. 떨어져 있어도 반추하면 가까워지는 그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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